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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n 06. 2018

1968+50: 새로운 세상, 새로운 영화

2018.05.24, 서울아트시네마.


Jean-Luc Godard en 1967:

실험영화의 범주에 속할 만한 작품들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다. 장-뤽 고다르가 1967년에 만든 두 작품, ‘중국 여인’ 그리고 ‘주말’을 이번 기획전에서 관람했다. ‘1968+50: 새로운 세상, 새로운 영화’라는 기획전의 거창한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번 기획전에서는 장-뤽 고다르가 68혁명 즈음 그리고 70년대에 만들었던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는 이름 하에 장-피에르 고랭과 장-뤽 고다르가 함께 만들었던 작품들이 참 궁금했지만, 결국 일정이 맞지 않아서 죄다 놓치고 말았다.



La Chinoise,

얼핏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카메라 안과 밖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뒤섞어 만들어낸 ‘중국 여인’에는, 당시 고다르가 심취했던 모택동주의에 대한 찬양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 ‘La Chinoise’는 짐작컨대 ‘La (Révolution) Chinoise’ 혹은 La (idée) Chinoise’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번역은, 중국 여인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여성명사인 ‘중국 혁명’ 내지는 ‘중국 사상’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그 애매성을 담은 ‘The Chinese’이다.) 말하자면 한 발 물러선 프로파간다 영화라 해야 할까, 극중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듯 영화는 ‘뉴스’다. 1967년이라는 사상적 격변기를 가감없이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상 특정한 이념을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가 모택동주의를 다루는 영상은 결국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소위 모든 ‘이념’들의 숙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이며, 고다르의 당시 시대(정확히는 68혁명 즈음의 프랑스)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느껴지는 기묘한 나른함은, 결국 이 영화가 역설하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체화하고 있는 경지로도 보인다. 하지만 고다르는 주저않고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변호한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 기차에서 선생님과 학생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말하자면, ‘중국 여인’은 장-뤽 고다르의 이념적 명상록이다.



Week End,

‘중국 여인’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정말 갈 때까지 가고 하고 싶은대로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더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주말’은 그만큼이나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이다. 부르주아 부부의 어떤 주말을 담은 이 영화는 사회적 금기를 무시하고, 도덕적 해이를 직시하며, 영화적 거짓을 전복한다. 미치광이 고다르의 일갈이라 한다면 적절할까. 공산주의적 이념에 빠진 당시 고다르의 천착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자체로 혁명적 분위기로 들썩인다. 주인공 부부가 지나는 그 묵시록적 교외는 결국 좁게 바라보면 프랑스 사회의, 넓게 바라보면 보편적 인간사의 축소판일 것이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는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 즐비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서로를 죽일 듯 적대시하던 군상들이 힘을 합쳐 득세하며, 보헤미안 신이 양떼를 몰고 등장하거나, 사상에 취한 급진주의자들이 목놓아 이념을 선창하는데다,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이들이 서로의 대변인이 되어 웅변한다. 나는 이 우악스런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장-뤽 고다르의 영화세계도.



et la Typographie!

장-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그리고 특히나 ‘중국 여인’과 ‘주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특유의 타이포그래피일 것이다. 이 두 영화에서 모두 타이포그래피는 단순한 타이틀 시퀀스 혹은 섹션의 도입을 넘어서 영화적 리듬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리고 i를 위시한 이 특유의 타이포그래피와 영화적 리듬의 형성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에서 그대로 차용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거나, 일부분을 변형시킨 채 반복되거나, 분절되어 차례대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워넣어진 영화의 각 장면들은 과감하게 말하자면 타이포그래피의 연쇄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중국 여인’과 ‘주말’의 타이포그래피(그리고 이들을 제시하는 방법)에 담겨있는 것은 고다르가 세상을 마주하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건 장-뤽 고다르의 엄격하고 자유로운 ‘형식미’ 그 자체다. 이는 혼란스럽고 열정적이지만, 더없이 확고하고 냉철하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면서도(‘네 멋대로 하라’를 보라), 고다르는 언제나 영화가 형식일 수밖에 없음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중국 여인’과 ‘주말’의 구조적 화술은 형식미적인 엄격함에 빚을 지고 있음이 명확하며, 이건 고다르 영화세계의 원동력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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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41 중국 여인 / The Chinese (La Chinoise, 1967)

S042 주말 / Weekend (Week End,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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