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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n 07. 2018

시네마테크 아카이브 특별전: 로메르의 사계절

2018.06.01 - 2018.06.03, 서울아트시네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짧게 열린 이번 기획전에서 에릭 로메르가 90년대에 만들었던 ‘사계절 연작(Contes des Quatre Saisons)’을 보았다. 작년 에릭 로메르 회고전에서 놓친 게 아쉬웠는데 다행히 네 작품 모두 이번 기회에 모두 볼 수 있었다. 에릭 로메르는 불문율로 여겨지는 도덕윤리를 교묘하게 건드리는 데서 오는 기묘한 감정을 통속극 속에 녹여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언제나 화술이다. 로메르의 영화들은 대부분 소품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가 만든 작품들은 ‘연작’의 형태로 묶어볼 때 더욱 흥미롭다.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여섯 개의 도덕 연작’, ‘희극과 격언 연작’과 더불어 ‘사계절 연작’의 네 작품 역시 그렇다.


1998, 가을 이야기 Conte d'automne


사계절을 배경으로 삼은 네 편의 이야기 속에서 항상 누군가는 결정을 내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불확실한 상태에 놓인 인물들이다. ‘봄 이야기’의 잔느(안느 테세드르)는 묘사되지 않는 이야기 밖의 사랑과 내내 묘사되는 이야기 안의 사랑 사이에서,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샤를로뜨 베리)는 이상 속 과거의 인물과 현실 속 현재의 인물 사이에서 갈등 끝에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여름 이야기’의 가스파르(멜빌 푸포)는 음악이라는 이성과 세 갈래의 사랑이라는 감정 사이에서, ‘가을 이야기’의 마갈리(베아트리스 로망)는 다가가지 않으려는 소극적 행동과 다가가야만 하는 적극적 행동 사이에서 갈등 끝에 결정을 내린다. 결국 ‘사계절 연작’은 결정의 영화들이다. 그 결정이 고심 끝에 내려진 것이든 홧김에 내려진 것이든, 이 네 편의 영화는 결정의 순간을 묘사하기 위해서 끝까지 나아간다.


1996, 여름 이야기 Conte d'été


이 네 작품은 두 작품씩 묶어서 볼 때 더 재미있는데, ‘봄 이야기’와 ‘여름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영화 첫 장면에서 자신이 지내게 될 타인의 집을 방문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 곳을 떠나며, ‘가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영화 첫 장면에서 원형적인 사건이 묘사되는 장소에 함께 모여 있으며 영화의 마지막에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즉 ‘봄 이야기’와 ‘여름 이야기’에서는 그 계절 동안 벌어지는 (실타래와도 같은) 일정 기간의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가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에서는 그 계절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든 (바늘 끝과도 같은) 특정 시점의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편 ‘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인공들이지만, ‘여름 이야기’와 ‘가을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여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메르의 영화에서 항상 그랬듯 그가 그려내는 여성상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즉, ‘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의 주인공이 플롯의 주체적 존재라면, ‘여름 이야기’와 ‘가을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엄밀히 말하자면 플롯의 객체적 존재이다.


1992,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


그러니까 사계절 연작은 이러한 여러가지 특징들을 변주하면서 에릭 로메르가 만들어 낸 네 가지 갈래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좀 더 계산적으로 말하자면, 이 네 편의 영화는 상술한 두 가지 조건을 변인으로 둔 2x2 행렬의 각 칸에 채워넣어진 이야기로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네 이야기를 한데 합친다면 로메르가 그려내고 싶었던 ‘사계절 연작’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같이 통속적인 사랑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이 네 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아슬아슬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거창하게 변호한다. 본능적 행동과 도덕적 규범 사이의 충돌 혹은 융합. 이건 ‘사계절 연작’의 의도와 본질을 넘어서 에릭 로메르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근간이자, 인간의 욕망이라는 본성이기도 할 것이다. 에릭 로메로는 다소 온화한 화법을 구사하는 듯 하면서도 이런 민감한 치부를 찌르는 데에 거침이 없다.


1990, 봄 이야기 Conte de printemps


무엇보다도 ‘사계절 연작’의 네 작품은 하나같이 계절의 감각을 체화한 듯 보인다. ‘봄 이야기’ 속 사랑 사이를 떠도는 주인공의 권태로운 이야기에서는 봄의 나른함이 느껴지고, ‘여름 이야기’ 속 바닷가를 배회하는 인물들의 사랑이야기에서는 여름의 강렬함이 선연하다. ‘가을 이야기’ 속 원숙한 인물들이 사랑과 관계를 숙고하는 모습에서는 가을의 농밀함이 무르익고, ‘겨울 이야기’ 속 과거의 사랑을 앓는 주인공의 현재 이야기에서는 겨울의 찬바람이 사무친다. 이 네 작품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대로 3일에 걸쳐 다 보고 나니, 마치 1년이 훌쩍 지나간 것만 같은 느낌까지 느껴질 정도다. 물론 네 작품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가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가 특히나 좋았다. 내내 풀어놓기만 하던 이야기를 이렇게나 두근거리게 봉합할 수 있는 에릭 로메르의 능란한 영화적 마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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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43 봄 이야기 / A Tale of Springtime (Conte de Printemps, 1990)

S044 여름 이야기 / A Summer’s Tale (Conte d’Été, 1996)

S045 가을 이야기 / Automn Tale (Conte d’Automne, 1998)

S046 겨울 이야기 / A Tale of Winter (Conte d’Hiver,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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