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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n 09. 2018

7th 아랍영화제 ARAFF

2018.06.04 - 2018.06.05, 아트하우스 모모.

올해로 일곱 살이 된 아랍영화제에서 네 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어느 영화제건 이런 경우가 정말 드문데, 이틀 동안 본 네 편이 정말 하나같이 좋았다. 나빌 아우크의 경우는 전작 ‘머치 러브드’를 봤던 터라 신작이 궁금해서 골랐지만, 다른 세 작품은 이름을 들어봤을 뿐 작품으로는 처음 접하는 감독들이었다. 작년 부산에서 놓쳤던 튀니지 여성감독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뷰티 앤 더 독스’가 네 편 중 가장 좋았다(올해 본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한 편이라 생각한다). 쿠르디스탄 지역과 벨기에를 배경으로 한 사힘 오마르 칼리파의 ‘자그로스’도 이야기의 밀도는 다소 아쉽지만 그 접근법이 좋았고, 팔레스타인 출신 안느마리 자시르의 ‘와지브’는 보는 내내 미소와 온기가 맴도는 훌륭한 드라마였다. 모로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나빌 아우크의 신작 ‘라지아’ 역시 좋았다. [*네 편의 영화평에, 특히 '라지아'의 경우, 일정 부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그로스 زاگرۆس 

사힘 오마르 칼리프의 장편 데뷔작 ‘자그로스’는 진진하고 강렬한 드라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시간 관계상 포기했던 작품이었는데, 다행히 이번에 상영해 준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시놉시스를 통해 짐작했던 내용과는 다소 다른데, 생각보다 더 답답하고 무겁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결국 이 영화는 여성의 자유를 폭압하고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가부장적 전통의 존속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특히 이 영화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자유를 폭압받는 이를 바라보는 중간자적 시선의 한계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하빈’이 아니라 ‘자그로스’인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말하자면 자기성찰적 영화이다.) 극중 언급되듯, 쿠르드 지역 동북쪽에 위치한 자그로스 산맥과 주인공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그로스 산맥이 위치한 쿠르디스탄 지역은 터키와 시리아,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지정학적 중간지역이며, 주인공 자그로스(페이야즈 두만)는 가부장적 전통과 현대적 가치관 사이에 놓인 중간자적 존재이다. 결심 끝에 가부장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벨기에로 떠나는가 싶던 자그로스는, 결국 뿌리깊게 박힌 전통이라는 폭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건 전통이라는 이름의 지옥으로부터 탈출했음에도 자신이 여전히 지옥에 있다고 믿은 한 남자의 무지에서 야기된 파멸이다. 영화에서 숱한 인물들이 하빈(할리마 일테르)을 대하는 방식에는 전통이라는 지옥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극을 끝맺는 방법이 더없이 강렬한 ‘자그로스’는, 앞으로도 이 감독의 작품을 기대해 볼 필요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와지브 واجب

따스하고 날카롭다. 안느마리 자시르의 세 번째 장편영화 ‘와지브’는 주제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 훌륭한 드라마다. ‘와지브’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나사렛으로 돌아온 아들과 아버지가 겪는 하루동안의 해프닝을 그린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따스한 휴먼 코미디라 할 수 있을 이 영화는, 그 속에 현대 중동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기에 동시에 인상적이다.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대립을 통해 드러나는 세대 혹은 집단 간의 갈등을 다루는 방식도 인상적이고, 전통적인 관습에 대해 가감없이 드러내는 비판 의식이나 진취적인 사고가 돋보이는 것도 역시 그렇다. 인물들의 이름이나 살고 있는 나라를 헷갈리는 행위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암시하고, 직업을 숨기거나 밝히는 행위를 통해 규범을 은닉하거나 타파하려는 양가적인 행위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정신없는 하루가 끝난 뒤, 담배를 피우는 주인공들의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은 (주인공들이 담배를, 그리고 서로가 피우는 담배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없이 뭉클하다.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나사렛 안의) 아버지와 현실에 저항하고자 했던 (나사렛 밖의) 아들을 다루는 극의 양상과 균형감이 훌륭하다.



뷰티 앤 더 독스 على كف عفريت

튀니지의 카우테르 벤 하니아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이 영화를 보면서 실감했다. 명명백백 다루어져야만 할 이야기를 이렇게나 가감없이 다루어내는 날카로운 영화 만듦의 목적 의식이 인상적이고, 영화적 수단들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영화 만듦의 미학적 견지 역시 인상적이다. 튀니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경찰에 의한 성폭행 사건을 극화해서 만들어낸 이 영화는, 사건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후의 재판에 이르는 긴 이야기에서 어느 부분을 선택하고 어떤 방식으로 집중할 것인지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다. 카메라를 거울과 동치시킨 뒤 카메라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거울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 너머로 카메라를 이동시켜 시점을 역전시킨 뒤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단 9개의 롱테이크 쇼트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이렇게 구조화한 것은, 이 답답하고 잔인한 하룻밤 동안에 관객들을 붙박아두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뷰티 앤 더 독스’는 보는 영화가 아니라 보아내는 영화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복합적이고, 널리 알려진 동화의 제목을 비틀어 차용한 영화의 제목이 인상적이며, 극 중간부터 등장하는 베이지색 베일을 주인공이 두르는 방식의 변화에서 상징적으로 읽히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 지극히 영화적이다. 현대 튀니지 영화계에는 지난한 현실을 마주할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용기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이 사건의 ‘결말’이야말로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그리고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지 않은가.



라지아 رازيا

모로코 감독 나빌 아우크의 신작 ‘라지아’는 기본적으로 옴니버스 식의 전개를 지닌 영화이다.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를 통시적으로 만들었다고, 혹은 워쇼스키 자매와 톰 티크베어가 공동으로 감독한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인물의 제각기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지만, 그 중 하나의 이야기는 30년 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전체 구조에 있어서 일종의 원형이 되는 이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새 것(아랍어)은 옛 것(베르베르어)을 몰아내려는 악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새 것(프랑스어)이 옛 것(아랍어)을 점령해버린 것처럼 묘사되는 현재에 이르자, 옛 것과 새 것들 사이의 역학관계는 다소 흐려진다. (파티 장소에서) 옛 것을 배척하는 새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한 뒤에도 새 것을 껴안고 목놓아 우는 인물이나, 옛 것(에 해당하는 방법)으로 새 것을 없애려 했지만 결국 새 것을 안고 가기로 결심하는 인물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고 믿었던 ‘카사블랑카’는 사실 카사블랑카에서 촬영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그래서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로 합치되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은 대규모 시위와 병렬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영화의 원제 ‘라지아’는 아랍어로 ‘습격’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자리한 다소 난해하지만 인상적인 화법은, 결국 그 가치가 어떻든 간에 과거와 현재 또는 새 것과 옛 것이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나아가고 있다고, 또는 어쩔 수 없이 서로 함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영화의 마지막 직전 장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배달에 실패한 채 문 앞에 놓아두었던 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전통을 수호한다고 상징적으로 묘사되던 과거의 인물이었다.) 결국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게 하는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중간자적 존재로 그려진다는 사실은(그들은 모두 시위 현장을 무리없이 통과하거나, 난리통에 뛰어들지 않고 대신 사건을 관망한다),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지향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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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47 자그로스 / Zagros (زاگرۆس ,2017)

S048 와지브 / Wajib (واجب ,2017)

S049 뷰티 앤 더 독스 / Beauty and the Dogs (على كف عفريت ,2017)

S050 라지아 / Razzia (رازيا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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