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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08. 2018

샹탈 아커만 특별전

2018.08.25, 부산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

벨기에의 여성감독 중에서 가장 높은 영화사적 성취를 이루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샹탈 아케르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회고전이 열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이번에야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기획전 표기는 ‘아커만’이지만, 그녀의 이름 Akerman은 프랑스어 발음으로 [akɛʁman]이기 때문에 ‘아케르만’으로 적도록 하겠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진행되는 기획전들은 거리가 거리인지라 평소에는 쉽사리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다행히 부산에 일이 있어 들른 김에 영화제 때만 들르는 시네마테크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시간 관계 상 한 편만 챙겨볼 수 있었지만, 그 작품이 샹탈 아케르만의 대표작이자 훌륭하기 그지없는 걸작 ‘잔느 딜망’이어서 정말 반가웠다.



샹탈 아케르만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1975년작 ‘잔느 딜망’은 무려 200분이 넘는 무지막지한 러닝타임 동안, 주인공 잔느 딜망(델핀 세리그)의 일상 외에는 어떤 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매일같이 집안일을 하거나 정기적으로 매춘 행위를 하는 그녀의 일상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 리듬이 적확하기 그지없어 일견 차가워 보이지만 결국 묘하게 따스하다. 그녀 인생의 극히 일부라 할 수 있을 단 3일을 떼어놓고 있는 이 영화는, 결국 시작이 아니라 끝에 방점을 찍는 영화이기도 하다. (3일 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 영화는 각 하루가 시작하는 순간이 아닌 끝나는 순간에 비로소 자막을 띄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에서 무엇이 변화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없이 규칙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첫 번째 하루가 끝나자, 둘째 날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규칙이 균열로 바뀌는 과정의 묘한 리듬이야말로 ‘잔느 딜망’이 기나긴 러닝타임 동안 담아내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영화적 목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잔느 딜망’에서 중요한 고찰은 그녀의 삶에서 무언가가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고찰 속에서 변화는 현재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의 성격을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잔느 딜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잔느 딜망의 삶은 ‘완결되어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지는 것’에 가깝다.) 결국 ‘잔느 딜망’은 무미건조한 한 여성의 일상(과 일탈)을 통해서 관습적으로 억압되어 온 성역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샹탈 아케르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응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통해 그 관습을 깨부수려 한다.




[이하의 내용에는 결말부에 대한 암시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녀와 아들이 단 둘이 지내는 집의 거실에는 밖에서 들어와 비치는 푸른 빛이 감돈다. 거실의 불이 꺼졌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 그 푸른 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러닝타임 내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잔느 딜망이 일탈을 저지른 이후, 이는 극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니까 결국 반복에 균열이 가고, 그 균열을 매개로 탄생한 이 영화의 롱테이크 쇼트 엔딩은 너무나도 황홀하다. 균열 그리고 일탈은 결국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바로, 불 꺼진 거실의 푸른 빛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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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76 잔느 딜망 / Jeanne Dielman, 23 Commerce Quay, 1080 Brussels (Jeanne Dielman, 23 Quay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

dir. 샹탈 아케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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