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6 - 2018.08.15, 서울아트시네마.
올해도 어김없이 진행된 서울아트시네마의 연례행사 씨네바캉스. 작년에 못 가서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작품들을 놓쳤던 게 한에 사무쳤는지 올해는 모범적으로 출석했다. ‘녹색 광선’이 워낙 좋아서 두 번 보고 싶었는데 일정 상 포기했고, 기예르모 델 토로 미니 특별전(?)을 포함해서 총 8편을 봤다.
아직까지 올해 정식개봉작 중 최고의 작품은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 물의 모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 씨네바캉스에서 그의 대표작들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크로노스’는 몇 년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다시 보아도 여전히 인상적인 데뷔작이었고, 그의 헐리우드 데뷔작 ‘미믹’은 다소 아쉬운 점이 눈에 밟히지만 그의 장르물에 대한 애정이 여실히 살아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필모그래피를 (‘헬보이’, ‘블레이드’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본 입장에서, 그의 대표작 세 편을 꼽으라면 일말의 주저 없이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 물의 모양’을 뽑을 것이다. (올해는 이 세 작품을 모두 극장에서 보다니 정말 특별한 해다.) 이 세 편이 본인의 취향으로 빼곡히 채워진 기예르모 델 토로의 필모그래피 상에서도 특히 가장 훌륭한 이유는, 이 세 작품이야말로 그의 장르적 천착이 역사적 현실을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브런치에도 올린 ‘셰이프 오브 워터’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이 셋은 이야기의 동인(動因)에 있어서 닮아있는데, ‘악마의 등뼈’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참담한 역사를 호러의 형식을 빌어서, ‘판의 미로’가 동일한 시점의 역사를 동화의 형식을 빌어 풀어낸 작품이었다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미소 냉전기의 공허한 역사는 멜로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된다.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현실을 환기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이 세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다 칭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F.W. 무르나우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와 제임스 웨일의 1931년작 ‘프랑켄슈타인’은 모두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두 편 모두 거의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두 편의 음산한 호러가 주는 분위기는 정말이지 당시에 비교불허의 것이었음이 자명해 보인다. 심지어 이제는 두 편 모두 고전 중의 고전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오늘날 살펴보아도 흥미로운 담론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인간의 욕망에 의한 부산물을 인간이 심판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관점과, 소수자에 대한 핍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도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노스페라투’를 포함한 그의 다른 작품도 궁금한데,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아쉽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하나같이 흥미롭고 자주 훌륭하지만, ‘녹색 광선’은 내가 이제까지 본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에릭 로메르는 능숙한 화법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지극히 영화적으로) 엔딩을 마무리짓는 능력이 언제나 탁월했지만, ‘녹색 광선’의 엔딩은 그 자체로 말로 형언하기 힘든 경지의 황홀한 마무리라 할 수 있다. 쥘 베른의 동명소설에서 이야기의 일부로 가져온 녹색 광선이라는 소재는 영화 중반 이후에 계속해서 환기되는데, 이 영화에서의 녹색 광선이란 그 자체로 주인공의 (내면의 논리와 믿음을 갈구하는) 성격과 맞닿아있다. 그런데 ‘녹색 광선’의 대사가 상당수 즉흥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 모두와 그렇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녹색 광선’은 특별해 보이지만 보편적인 인물상에 대한 이야기이고,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6부작 중 다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녹색 광선’에서 (얼핏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일로)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 속의 상이 된다. 한편 이안의 초기작인 ‘음식남녀’는, 이안이 어떤 장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막장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소품격의 작품에는, 이안이 바라보는 대만 사회의 모습과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산뜻하게 묻어나온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21세기 들어 이안이 만들어낸 인상적인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때 더욱 흥미로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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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68 녹색 광선 / The Green Ray (Le Rayon Vert, 1986) by 에릭 로메르
S069 노스페라투 (Nosferatu, 1922) by F.W. 무르나우
S070 크로노스 (Cronos, 1993) by 기예르모 델 토로
S071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Pan’s Labyrinth (El Laberinto del Fauno, 2006) by 기예르모 델 토로
S072 미믹 (Mimic, 1997) by 기예르모 델 토로
S073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1931) by 제임스 웨일
S074 음식남녀 / Eat Drink Man Woman (飲食男女, 1994) by 이안
S075 악마의 등뼈 / The Devil’s Backbone (El Espinazo del Diablo, 2001) by 기예르모 델 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