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12편.
이번에도 어김없이 합니다. 작년에 극장에서 관람한 개봉작 116편중에서 가장 좋았던 12편을 골라 보았습니다. 재개봉작, 늦은 개봉작, 영화제/기획전 등은 전부 제외했습니다. 작년은 유달리 작품들 간의 편차가 크지 않아서, 순위를 매기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네요. 해서, 눈물을 머금고 컨택트 (드니 빌뇌브),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 토니 에드만 (마렌 아데), 언노운 걸 (다르덴 형제), 어 퍼펙트 데이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다섯 편을 뺐습니다. 그럼 시작!
영국의 모험가 퍼시 포셋의 일대기를 각색해서 만든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아하다. 이상향에 사로잡혀 실재하는지도 알려진 바 없는 전설 속의 도시를 향해 떠나고, 역설적으로 이상향 때문에 노스탤지어를 겪는 그의 삶은, 황량하다기보다는 황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실종되었기에) 알 길 없는 그의 마지막 기록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찾아 헤맸기에 잃어버린 것들, 그러나 잃어버렸기에 믿을 수 있었던 것들. 전작 ‘이민자’와 마치 거울쌍을 이루는 것만 같은 이 영화의 엔딩은, 제임스 그레이가 그리는 이상향이라는 이름의 환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환영을 왜 믿어야 하는지를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보여준다. (The Lost City of Z, 2016)
삶이 도돌이표와도 같다면, 하나의 생명이 떠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반복되는 삶에 대한 훌리오 메뎀의 천착은, ‘내일의 안녕’이라는 아름다운 생의 찬가를 낳았다. ‘북극의 연인들’에서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이름 속 회문(回文)은 영화에서 중의적인 표현 ‘ma ma’로 활용되고, 북극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상상 속 소녀 나타샤가 존재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마그다(페넬로페 크루즈)에게 부여된 상징성 가득한 이름은, 결국 그녀가 지니는 삶의 무게를 교묘하게 환유한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상징적으로 동일시되는 네 명의 존재를 통해, 훌리오 메뎀은 결국 그의 영화세계를 은밀하고 오롯이 투사한다. (Ma Ma, 2015)
망령이 떠도는 사후세계. 결코 증명할 수 없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이 단편적인 상상을, 데이빗 로워리는 하나의 장편으로 번듯하게 만들어냈다. 단순하고도 명징한 이 시각적 상상력은, 죽은 자의 생에 대해 우리가 관념적으로 상상하곤 하는 바를 동화적으로 그려낸다. 시간의 급변이 공간에 투영되고, 공간의 급변이 시간에 투영된다는 점에서 죽은 자의 시공간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고, 두 익명의 남녀(C, M)를 주인공으로 삼거나 그 정체를 구체화하지 않은 제목(A Ghost Story)이 돋보인다. 그러니 이 영화는 특정한 유령이 아니라 어떤 유령(들)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다면 결국 이건, 오히려 역사와 반복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A Ghost Story, 2017)
줄곧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작 ‘마미’에 이어 영화적 실험을 시도하는 자비에 돌란은 아직까지는 퍽 흥미롭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시작되고, 누군가가 자신의 눈을 가린 채 끝난다. 비유하자면, 어쩌면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담아내고자 했던 것들은 영화 속에서 담겨진 적 없었던 것들 속에 숨겨져 있었다. 루이와 가족들 사이의 과거가 그랬고, 가족을 떠난 루이의 12년 동안이 그랬고, 곧 다가올 루이의 죽음이 그랬다. 그러자 극중 단서들로 이야기의 전말을 짚어낸 관객들은, 소통을 바라고도 소통할 수 없었던 이의 비극과 마주한다. 세상의 끝은, 단지 그에게만 찾아왔으니까. (Juste la Fin du Monde, 2016)
‘천년을 흐르는 사랑’과 ‘노아’의 종교적 알레고리에, ‘레퀴엠’과 ‘블랙 스완’의 자기파괴적 모티프가 뒤섞인 압도적인 괴작. 성경을 그대로 따온 이야기의 얼개 속에, 불교적 윤회 사상과 인류의 역사까지 과감하게 흘려넣으며 만들어낸 이 직설적이고도 어마무시한 작품은, 시종일관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세계를 소멸하려는 시작(詩作)과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작(詩作)의 공존. 이 아이러니는 결국 종교이자, 역사이며, 생명으로서의 집이라는 공간 그 자체이다. 이 야심으로 가득찬 거대한 영화에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것에의 회귀로서의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에 느낌표를 덧붙인 제목이 너무나도 제격이다. (mother!, 2017)
이제까지 나온 9편의 엑스맨 시리즈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근 몇 년 간 홍수처럼 범람해 온 히어로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감정적으로 접근한다면 ‘가족’의 궤 속에서 뭉클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한다면 ‘죽음’의 맥 속에서 아릿하다. 디스토피아적 설정이 매력적이고, 서부영화의 방향을 교묘하게 비튼 내러티브가 훌륭하며, 거짓된 것이라 여겨지던 것들이 진짜가 되어가는 과정이 진진하다. 무엇보다도 ‘로건’은 다음 세대를 위해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지켜내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의 영화이기도 하다. 20년의 세월 동안 보아온 까닭에 쉬이 보내줄 수 없는 이들을 향해서, 영화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작별인사.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X. (Logan, 2017)
아마도 프랑수아 오종의 최고작. ‘쌍둥이’라는 뻔하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원작 위에 괴이하고 논쟁적인 설정을 덧붙인 뒤, 욕망과 파멸의 모티프로 시종일관 강렬하고 관능적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마린 박트와 제레미 레니에의 열연 속에서, 마치 덩어리와도 같이 느껴지는 이 영화는 그 덩어리가 분열하는지, 합일하는지에 따라 인물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대담하고 도발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침착한데다, 촘촘하게 짜여진 내러티브 덕에 심리적 밀도가 굉장하다. 하나와 둘, 그리고 그 사이를 종횡하는 욕망 또는 원망에 대한 섬짓하도록 매혹적인 싸이코 스릴러. (L'Amant Double, 2017)
이제는 SF 장르의 클래식이라 칭해지는 리들리 스콧의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라는 압도적인 무게감 위에서도, 드니 빌뇌브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낸다. 새롭게 등장한 K(라이언 고슬링)가 겪는 거대한 여정의 한가운데, 35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의 벅참. 결국 정체성과 신념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으로 빼곡한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아득한 세월을 넘고도, 클래식에 누를 끼치기는 커녕 세계관을 단단히 여민 뒤 확장해내는 놀라움이 돋보인다. 포스트 리들리 스콧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컨택트’에 이은 드니 빌뇌브의 SF 2연타. (Blade Runner 2049, 2017)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인터스텔라’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만회하며,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신의 미학적 야심과 연출적 고집을 훌륭하게 투영한 전쟁영화를 만들어냈다.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작법이 새롭지만, 시공간을 뒤섞고 교차 편집을 위시하는 스타일은 여전하다. 시네마스코프(2.39:1) 그리고 필름 아이맥스(1.43:1)라는 대조되는 두 가지 화면비를 혼용하고 그 사이의 높이감과 깊이감을 환원해서, ‘덩케르크’는 전쟁의 압도감과 인간의 무력감을 관객에게 동시에 체화하게 만든다. 그 결과, 관객들이 체험하는 전황 속에서 1940년과 오늘날 사이의 시네마적 시간은 교란되고, 수렴하던 시공간은 다시금 발산한다. 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의 놀라운 진일보. (Dunkirk, 2017)
일견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가 파블로 네루다의 전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의 인생과 저작에 감응한 대중들의 민요에 가깝다. 가상의 인물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를 통해 풀어가는 파블로 라라인의 ‘네루다’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다. 이 영화의 시적인 운율 속에서,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모두의 노래’였으며, 오스카는 사실 네루다의 창작원(原)인 동시에 창작물(物)이었다. 하얀 눈밭이라는 종이 위에 붉은 피라는 잉크가 퍼져나가는 순간의 선연한 아름다움과, 그렇게 발현된 시 쓰는 자아와 의지가 소명되는 순간의 사명감. 그렇게, 그 자체로 시가 되어버린 한 남자는, 어쩌면 영화를 넘어서 신화에 더 어울릴는지도 모르겠다. (Neruda, 2016)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바다 속에 터질듯이 뜨거운 감정적 기류가 일렁이는 드라마. 눈 내리는 보스턴에서 부동(不凍)의 바다가 있는 맨체스터로 돌아온 리(케이시 애플렉)의 이야기. 몇 년에 걸친 이야기들을 뒤섞으며 회술하는 중에도, 영화의 계절적 배경은 어김없이 겨울이었다. 과거에서 유래해 현재까지 뿌리내린 비극적인 사건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리의 죄책감 속 두 시간축은 뒤섞인다. 그가 익명으로 남아 살아갈 수라도 있는 보스턴과, 그가 무너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조차 없는 맨체스터. 원형적 공간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상실을 겪은 뒤, 영화 속 맨체스터 겨울 바다에 단 한 차례 내리던 눈이 모두 녹아 바다 되면, 그의 슬픔도 씻겨내려갈 수 있을까. (Manchester by the Sea, 2016)
이제 경지에 다다른 듯한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날카로운 이야기 세공력은 ‘세일즈맨’에서 시종 빛난다. 그의 전작들이 그러했듯, 모든 인물의 사정을 정당하게 변호하는 동시에 모든 인물의 변명을 정당하게 힐난하는 딜레마 속에서, 이란 사회와 제도적 관습의 모순은 은연중에 지적된다. 그리고 나서, ‘세일즈맨’에서 파르하디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수많은 것들이 동치되는 현실과 연극 사이의 어떤 공허. 그리고 극중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죽음을 괄호친 이유.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어서, 이제 현실과 예술의 간극까지 자유자재로 파고드는 파르하디가 직조해내는 딜레마는 놀랍도록 황홀할 뿐이다. (فروشنده,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