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부터 12월까지 극장에서 본 최신 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10편
하반기에는 특히나 바빠서 개봉작들을 많이 챙겨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는 무리해서 다녀온 보람이 있었고, 특히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작품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상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하 10편은 제가 올 하반기 동안 극장에서 관람한 93편의 영화들 중에서 고른 영화들입니다. 다만 영화제 등에서 공개되거나 올해 개봉한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이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악마의 등뼈’, 혹은 샹탈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이나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주하다’ 같은 뛰어난 작품들은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공개된 작품들 중에서도, 아쉽지만 리 워넬의 ‘업그레이드’나 파벨 파블리코브스키의 ‘콜드 워’, 토마스 스투버의 ‘인 디 아일’ 등이 순위에서 빠지게 되었네요. 그럼 10위부터 역순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장률의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장률의 두 영화세계가 맞닿는 지점에 놓여있다. 정체성적 질문이 주를 이루는 그 중 하나의 세계에서는 점이적 장소와 중간자적 정체성이 항상 중요한 역할을 했고, 꿈의 사유가 주를 이루는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는 그 의중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는 무의식의 묘사가 몽롱하게 펼쳐졌었다. 시작과 끝이 정확하게 맞닿아있는 이 영화의 구조적 구성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제목 역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더러, 마지막에 등장할 법한 영화의 제목은 영화 중반에 불쑥 등장하기까지 한다.) 극중 윤영(박해일)은 만나는 이들에게 구면이 아닌지를 반복해서 묻는다.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은 이 뜬구름같은 영화는 꿈결처럼 나른한 데자뷔(déjà-vu)가 되어 끝없이 되풀이된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8)
과시적인 촬영 테크닉과 직설적인 종교적 상징에도 불구하고, 코르넬 문드럭초의 신작 ‘주피터스 문’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력하게 밀어붙일 줄 아는 압도적인 영화적 에너지가 있다.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Europa)’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다 주인공의 이름을 ‘아리안’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유럽 세계가 직면한 난민 문제를 장르적 화법으로 다룬다. 일종의 초능력을 얻게 된 아리안(좀버 예거)과 그의 주위를 맴도는 가보(메랍 니니트쩨) 사이에서 환기되는 수직적 관계, 그리고 극중 인물과 실제 배우의 국적 사이의 기묘한 불일치가 인상적이고, 초능력을 갖게 된 아리안을 초월적 존재로 묘사하는 데서 오는 난민(피지배층)과 구호자(지배층) 사이 지위의 역전 역시 흥미롭다. ‘주피터스 문’은, 서사의 단점들을 초월하는 담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섣불리 넘길 수 없는 수작이다. (Jupiter Holdja, 2017)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마치 다양한 변인을 통제한 채 인물들을 던져놓은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전작 ‘더 랍스터’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감정사회학 실험실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신작 ‘킬링 디어’는 복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윤리사회학 실험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통제된 울타리 속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저히 개인일 뿐이라는 데에서 란티모스의 영화세계는 지독히 염세적인 무력감으로 싸늘하다. ‘킬링 디어’에 담긴 인간의 본성과 신화의 물성에 대한 스산한 성찰은 한 마디로 닮음이라는 비극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닮음의 비극을 바꿀 수 있는, 혹은 끝낼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킬링 디어’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자신의 세계를 단단히 여며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한다. (Killing of the Sacred Deer, 2017)
라두 주드식 메타영화. 소재를 선택한 뒤, 그 소재를 활용한 공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카메라 속에 담아냄으로써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야무지게 전부 다 한다. 극중에서 묘사되는 것은 광장극이 완성되는 과정이지만, 영화의 엔딩 지점에는 그 극을 실황으로 촬영한 것과 같은 시퀀스를 (편집 없이 길게) 담아냄으로써 본래의 목표 역시 훌륭하게 달성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지점에서는 해방감마저 느껴질 정도.) 결국,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을 통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실로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오프닝과 엔딩 부분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마리아나(이오나 야콥)의 등장과 퇴장을 전달하는 방식 역시 좋다. 하루 빨리 라두 주드의 필모그래피를 다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뛰어난 작품. (Îmi este indiferent dacă în istorie vom intra ca barbari, 2018)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배케이션’보다도 더 넓은 범위로 뻗어나간 루벤 외스틀룬드의 신작 ‘더 스퀘어’는 발칙하리만큼 흥미롭다. 백인 기득권의 시선에서 백인을 풍자하고, 예술 종사자의 발상으로 예술을 풍자하며, 위선적 군상의 입장에서 위선을 풍자하는 ‘더 스퀘어’는 결국 예술과 도덕 그리고 영화라는 추상성을 진진하게 다루어낸다. 영화 안팎으로 환기되는 (동명의) 설치미술 ‘더 스퀘어’와 영화예술 ‘더 스퀘어’를 자가당착의 모순 속에 밀어넣음으로써 얻어지는 이 영화의 신묘한 화법은, 풍자라는 요소를 유희에 가깝게 활용하고 있는 루벤 외스틀룬드의 거대한 놀이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에 놓여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위선이라는 역설일 것이다. 자기모순적 정언으로 가득한 ‘더 스퀘어’의 딜레마는, 작년 ‘더 스퀘어’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함께 극적으로 완성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quare, 2017)
마치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 필름자욱처럼, '남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작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아네트 베닝)의 삶 중 마지막 부분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현실적인) 현재와 (영화적인) 과거를 매듭지으려 노력한다는 점에서도 필름 (그리고 그 시대의 향취에 대한) 헌사로 켜켜이 쌓아낸 영화. 피터 터너(제이미 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인물에 대한 존중을 표할 줄 아는 영화. 인물에 스며든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의 뛰어난 호연으로 빛나는 영화. 형식적으로는 과거에 천착하면서도, 황금기를 반추하는 대신 황혼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맞이할 줄 아는 영화.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라는 원제처럼, 이건 스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회자될 이야기가 된다. 이 섬세한 결과 아련한 향을 지닌 정통 멜로는, 다소 갸우뚱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폴 맥기건의 최고작이라 하겠다.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2017)
과작하는 린 램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녀 특유의 작법이 장르와 만나 탄생한 굉장한 수작이다. 두 가지 시간대를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라는 인물의 도식을 적확하게 겹쳐놓는 이 영화는, 극중 현재에 불현듯 난입하는 과거를 통해 그 시차를 좁히려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인물은 조(호아킨 피닉스)이다.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그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사건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지만, 결국 그의 존재를 구원해주는 것은 ‘너는 여기에 없었다’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이 영화는 ‘여기’라는 직시적 표현에 드러나는 불특정한 장소에 대해 ‘너’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구원하려 한다. 린 램지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통해 수가 많지 않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획을 그었다. (You Were Never Really Here, 2017)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세계의 한 정점으로 보인다. 불완전한 이들이 이루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을 통해서 그는 본질적 관계와 (일본이라는) 특수한 사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번에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도둑질하는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라는 특성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혈연이 아닌 관계로 묶인 6인의 모습을 처음부터 하나의 덩어리처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며, 도둑질이라는 소재는 물론 그가 만들었던 여느 영화보다도 직설적인 묘사를 통해 일본 사회의 뒷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감없이 던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이래 23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천착해 왔던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고찰과 상념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은, 기쁘고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万引き家族, 2018)
누리 빌게 제일란은, 아마 영화가 영상예술이라는 근거로 제시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전작 ‘윈터 슬립’과 마찬가지로 여과없는 장광설과 끝나지 않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속세의 피로함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야생 배나무'는 소설가의 꿈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청년의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그 윗 세대로 이어지는 관계의 맥락을 품는다. 그리고 영화 속 두 차례 등장하는 밧줄을 통해 은유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는 물론, 마치 붕 뜬 것처럼 이질적인 영화 중반의 시퀀스 그리고 엔딩은 압도적이다. 결국 이 영화는 '우물'이다. 왜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왜 우물을 파내려가는가. 귀향과 죽음, 그리고 역사라는 세 가지 소재를 기나긴 시간 동안 '우물'로 절묘하게 버무려내는 누리 빌게 제일란의 솜씨는 역시나 훌륭했다. (Ahlat Ağacı, 2018)
알폰소 쿠아론의 최고작. 그가 직접 밝혔듯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게 바치는 자전적인 영화인 ‘로마’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적이고, 지극히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보편적인 모두의 이야기다. 알폰소 쿠아론의 근작들처럼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인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네마스코프 비율 속 완벽하게 짜여진 모든 프레임의 안과 밖은 서로 시청각적으로 조응하고, 마치 서로 공명하는 듯한 쇼트와 쇼트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는 러닝타임 내내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극중 세 차례 등장하는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묘사하는 양상은 메타시네마로서 ‘로마’의 가치를 훌륭하게 환기하고 있다. 마치 거울의 상 같은 ‘로마’의 오프닝과 엔딩은 황홀할 정도. 나는 ‘로마’의 모든 순간들을 마음 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다. (Roma,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