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 '주먹왕 랄프 2', '말모이', '그린 북' 등 6편
마치 심장박동을 닮은 영화. 내내 펄떡이고 있지만, 자세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신작 ‘레토’는 실존했던 인물인 빅토르(유태오)와 마이크(로만 빌릭)의 삶 중 일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인물에 대한 전기영화라기보다는 시대에 대한 르포영화처럼 보인다. 방종으로 치부되던 자유를 향한 정형화되지 않은 갈망은 영화 내내 특유의 리듬으로 살아 숨쉬고 있는데, 이를 담아내는 방식이 무척이나 감각적이다. 마치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듯 뮤직비디오처럼 촬영된 극 중 뮤지컬 시퀀스야말로 이 영화가 인물의 인생이 아닌 시대의 금기에 대한 영화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면들이 마무리될 때마다 스켑틱(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이 등장해 특정 문구와 정서를 환기한다. 심지어 극중 여러 차례 반복되는 뮤지컬 시퀀스에서 빅토르와 마이크는 단 한 차례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전기적이라기에는 무척이나 사회적으로 다가오는 이 영화는, 각본과 연출을 맡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회고록에 다름없을 것이다. ‘레토’가 필름(과 인물의 관계)을 다루고 있는 양상과 빅토르가 결성한 그룹명 ‘키노’를 떠올리면 이 영화의 지향점이 한층 더 분명해지기까지 한다. (‘키노кино’는 러시아어로 영화를 의미한다.) 이렇게나 감각적인 화술을 통해 이렇게나 시대적인 화두를 담아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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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 / Leto (Лето, 2018)
dir.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러시아)
★★★★
디즈니는 변함없이 영리하다. 전작에서 마무리지은 이야기를 어떤 소재와 방향으로 확장시켜야 할지를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며, 인터넷이라는 소재의 바다와 디즈니라는 저작권 괴물의 역량이 합쳐지자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과감하고 황당한 전개가 펼쳐지기까지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들과 마블 히어로, 반다이-남코 게임 캐릭터와 스타워즈 캐릭터까지 한 영화 속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인터넷 혹은 소셜 미디어라는 매체의 명과 암을 직간접적으로 건드리는 동시에, 전형적인 공주상을 보란듯이 비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싫어할 수 없도록 완벽에 가깝고 예측 가능하도록 짜여진 이야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전작 '모아나'처럼) 디즈니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공산품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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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 (Ralph Breaks the Internet, 2018)
dir. 리치 무어, 필 존스톤 (미국)
★★★
이탈리아 출신 타비아니 형제가 함께 만든 마지막 작품. (형인 비토리오 타비아니는 88살의 나이로 2018년 타계했다.) 거의 연극에 가까운 톤으로 만들어진 건조한 이 영화는, 초반부를 보면 얼핏 사랑과 우정에 관한 흔한 드라마인가 싶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소 의역된 이 영화의 영어 및 한국어 제목과 홍보 방향이 더욱 아쉽다.) 안개 자욱한 과거와 햇살 가득한 대과거를 끊임없이 오가던 초반부는 더 이상 시간을 거슬러가지 않는 후반부와 대비되고, 이때 주인공 밀톤(루카 마리넬리)의 지독한 무력감은 시대의 것과 동치된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라는 원제에서 드러나듯) 답을 구하기가 지난한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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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나의 사랑 / Rainbow: A Private Affair (Una Questione Privata, 2017)
dir. 파올로 타비아니, 비토리오 타비아니 (이탈리아)
★★★
허술하고 너절한 졸작.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방탕하게 일탈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든 우호적으로든) 그리고 싶었다면 거기에 맞는 연출과 각본이 따랐어야 했다. 인물의 일대기를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그리는 것이 목표인 양 짜여진 각본은 주인공(들)의 흥망성쇠에 관객들이 어떠한 감정도 이입할 수 없게 만든다. 장점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연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저 무던하기만 한 연출은 영화의 감정적 고저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안셀 엘고트 혹은 태런 에저튼과 같은 배우들도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전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지 못한다. 제임스 콕스의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은 그렇게 연초부터, 손쉽게 올해 최악의 영화 후보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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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 (Billionaire Boys Club, 2017)
dir. 제임스 콕스 (미국)
★
대중영화의 정석. 동시에 대중적으로 안전한 화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중영화. 엄유나 감독이 각본을 썼던 '택시운전사'와 그녀의 연출 데뷔작 '말모이'는 소재와 인물이 끌어낼 수 있는 공감의 정서를 백분 활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적 상상력을 빌어 풀어낸다는 점에서도, 신파의 한계를 역사적 울분의 힘으로 한껏 밀어붙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지나치게 극화된 캐릭터들 혹은 끝까지 도식적으로만 흘러가는 이야기 역시, ‘말모이’의 소재가 갖고 있는 함의가 더없이 큼을 알기에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그 맑고 순한 의도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말모이’가 바로 그렇다. 언어의 힘, 언어의 삶, 언어의 합. 더러 찾아드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말을 모은다는 것’의 가치를 말하려 애쓰는 ‘말모이’ 같은 영화가 만들어져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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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 MAL-MO-E: the Secret Mission (말모이, 2018)
dir. 엄유나 (대한민국)
★★★
피터 패럴리의 신작 ‘그린 북’은 모난 데 하나 없다. 인종차별로 인한 흑백갈등이 여전히 팽배했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계급 혹은 인종적 전형을 뒤엎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간다. (이 영화는 거칠게 말하자면 상류층 흑인과 하류층 백인의 이야기다. 이때 극중에서 여러 차례 환기되는 ’백인답다’ 혹은 ‘흑인답다’는 시대착오적인 수식어는 이 영화가 극복하려 하는 한계인 동시에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담고 있는 한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허샬라 알리와 비고 모텐슨의 뛰어난 연기는 풀어낼 때와 담아둘 때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극에 잘 녹아들어 있고, 혐오와 폭력이 얼룩진 시대의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다루면서도 두 인물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는 꽤나 합리적인 노선을 택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모난 데 하나 없기 때문에 모두가 좋아할 것 같은 영화.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아카데미에서 정말 좋아할 것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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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Green Book, 2018)
dir. 피터 패럴리 (미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