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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31. 2019

2019년 2월 하반기의 영화들

'살인마 잭의 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및 '빠삐용' 3편

R019 <살인마 잭의 집>

집착에 가까운 강박과 기벽을 넘어선 기행. 라스 폰 트리에를 요약하는 이 두 어구는 논쟁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신작 '살인마 잭의 집'을 수식하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발칙하고 위악적인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윤리적 통념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뒤틀린 감각으로 가득한 조소 섞인 유머를 날린다. (그런 식으로 맞이한 엔딩 뒤에 나오는 노래가 ‘Hit the Road Jack’이라니!) 온갖 예술의 형식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영화를 발췌해 끌어들이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결국 '살인마 잭의 집'은 라스 폰 트리에의 내면, 나아가 그가 인식하고 구성하는 세계(의 모순과 허구)를 적나라하게 직면한다. 그것이 치밀한 계획이든 단순한 우연이든, 잭(맷 딜런)이라는 인간이 범하는 죄를 단죄할 수 있는 수단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딜레마, 그리고 이를 미학적으로 탐닉하고자 하는 역설적인 표현법이 이 영화의 안팎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직전에 만들었던 소위 '우울증 3부작'의 특성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안티크라이스트'의 색채에 '멜랑콜리아'의 정서, 그리고 '님포매니악'의 구성을 마구잡이로 뒤섞은 것만 같다. '살인마 잭의 집'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측면에서는 이 영화를 '도그빌' 그리고 '만덜레이'에 이어 (미완성된) '미국 3부작'이라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라스 폰 트리에의 집약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테의 ‘신곡’에서 차용했음이 분명한) 이미지가 지옥 속에서도, 지옥 밖에서도 일렁이고 있기 때문. 이렇게나 윤리적으로 터부시되는 소재를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담론과 결부시켜서, 심지어 블랙코미디까지 곁들여 다룰 수 있는 배짱이 라스 폰 트리에 말고 또 누구에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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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집 (The House that Jack Built, 2018)

dir. 라스 폰 트리에 (덴마크)

★★★☆



R020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기어이 황실 치정극에조차 자신의 인장을 깊고 선명하게 찍어내고야 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번 작품은 그가 각본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렇다.) 총 8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영화는 인물의 대사를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그 대사를 읊는 사람이 그 장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떠올리면 기묘해진다. 물론 각자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소화하는 올리비아 콜먼, 레이첼 바이스, 엠마 스톤의 호연을 빼놓을 수는 없다. 뻔히 드러나 있듯 (그 대상에 무관하게) 욕망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을 이 영화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염세적인 세계관과 결합하자 더욱 기이하게 다가온다. 바닥에 가깝게 자리한 카메라의 시선 혹은 어안 렌즈로 촬영된 왜곡된 시점처럼, 뒤틀리고 일그러진 욕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그렇다. 한편 란티모스의 영화세계에서 주제의식은 항상 동물과 맞닿아 있었는데, ‘더 페이버릿’에서 이는 내내 극의 배경에 있다가 결말에 이르러 환기되는 토끼들에 의해 더욱 더 극대화된다. (흥미롭게도, 극중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전 두 작품의 소재이자 제목이기도 했던 랍스터와 사슴이 등장한다. 아마 다분히 그의 의도일 것이다.) 소재의 강렬함에 있어서도, 비유의 교묘함에 있어서도 그의 이전 작품들보다는 다소 옅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흥미진진한 또 하나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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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2018)

dir.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리스)

★★★☆



R021 <빠삐용>

앙리 샤리에르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973년작 '빠삐용'의 리메이크작인 마이클 노어의 '빠삐용’은 특히나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서 호연을 펼쳤던) 찰리 허냄과 (최근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돋보였던) 라미 말렉의 열연이 영화 전체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사적으로 범접하기 힘든 지위를 획득한 40년 이전의 전작을 현대 시점에서 되살려내는 과정에서, ‘빠삐용’은 무난한 완성도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 공감을 얻으려 한다. (혹은, 명백히 드러나 있듯 브로맨스의 측면에서 인상을 남기려 한다.) 그러나, 이 평범한 리메이크에서는 결국 배우들의 열연을 제외한다면 2017년 ‘빠삐용’만의 무언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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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 (Papillon, 2017)

dir. 마이클 노어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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