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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fille Dec 20. 2019

현대 사회의 엽기적 고난 속 천진난만 암퇘지

<암퇘지 / Truismes> - Marie Darrieussec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다는 말을 뼈저리 경험하는 요즘, 웬만하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근처 공원에서 달리려고 한다. 며칠 전에도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다 지겨워 France culture (문화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프랑스 국영 라디오)의 마스터클래스 Les Masterclasses라는 팟캐스트에서 우연히 마리 다리외세크 Marie Darrieussecq를 알게 되었다. 마스터클래스는 유명한 작가, 영화감독, 화가 등을 초대해 그들의 창작 방법에 관해 논하는 인터뷰식 강연이다. 주로 파리에 위치한 프랑수와 미테랑 도서관에서 진행되며, 강연의 내용은 France culture를 통해 전파되는 식이다. '예술도 다 사람이 하는 것이고, 최적화된 환경에서 자신을 굳게 믿으며 작업을 해나가면 된다', 는 긍정적인 생각을 강화하고 창작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가끔 듣는 편이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냥 랜덤으로 골라 듣는데, 작가의 이력이 꽤 흥미로웠다. 전직 정신분석가에 가끔 번역을 겸하기도 하는 현직 소설가. 문학 박사 논문으로 오토 픽션 Autofiction (자전적 요소가 강한 허구적 내용의 소설)에 관한 연구를 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전적인 소설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카프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십 대 후반에 <암퇘지 Truismes>라는 소설로 대박을 터트리며 데뷔했다. 향수 가게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점원이 점점 돼지로 변해가는 내용의 소설인데, 프랑스에서는 삼십만 부 이상 팔렸고, 약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47개의 국가에서 출판되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누벨바그의 전설인 장 뤽 고다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제로 영화화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아티스트들의 이력은 천차만별이고 다 나름대로 독특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성공적으로 데뷔를 한 작가들도 있고, 피에르 르메트르 Pierre Lemaître (프랑스 최고의 권위의 Goncourt 상을 거머쥔 오르부아르 Au revoir la haut의 작가)처럼 오십 넘어서 작가가 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던 건, 첫 소설 <암퇘지>의 대성공에 대한 그녀의 솔직한 발언 때문이었다. 데뷔작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대해 놀라지 않았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당시에 많이 미쳐 있는 상태라 프랑스 전체가 본인의 책에 대해 말하는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고, 사실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암퇘지> 같은 책을 쓰지도 못했을 거라고.


<암퇘지>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된 이 소설의 불어 제목은 Truismes이다. 처음에는 암퇘지라는 Truie라는 명사에 -isme이라는 제도, 체계, 이데올로기 등을 지칭할 때 쓰이는 명사 어미가 붙어 암퇘지 주의 혹은 암퇘지의 방식 정도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Trusime이 ‘명백한 진실’을 뜻하는 명사임을 알게 되었다. 중의적인 제목일까? 한 여성이 암퇘지로 변화하는 괴기한 소설의 내용과 '명백한 진실이라는 단어 Truisme'과 어떤 관계가 있나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소설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혀 없는 어리석은 주인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사실적인 문제들을 풍자스럽게 그려낸다.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문단의 구분이 거의 없이 화자가 미래의 독자에게 주절거리는 방식이다. 매우 쉬운 단어들로 가끔은 독자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는 구어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익명의 화자는 자신의 겪은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얼마나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지에 대해서 미리 예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펜을 잡고 있는 손은 경련으로 떨려온다. 해가 지고 빛이 부족해지면 글을 쓰는 것도 멈춰야 하는데, 나는 매우 매우 느리게 쓰고 있다. 이 공책을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지, 진흙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더럽히고, 겨우 쓸만한 잉크도 흐리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돼지가 써낸 글들을 해독해 낼 인내심 많은 편집자가 최대한 알아볼 수 있도록 쓰려고 했던 나의 상당한 노력을 고려해주길 바란다.” 이렇게 소설은 이미 돼지가 되어버린 여자가 지금 상황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겪은 일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익명의 화자는 이십 대 초반의 평범한 여성이다. 한국의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Baccalauréat 시험 이후 바로 구직활동을 시작한다. 몇 번의 헛된 면접 이후, 그녀는 거대한 향수 체인점에 ‘번개 지원 Candidatrue Spontanée’을 한다. “사장님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손가락으로 내 오른쪽 가슴을 톡톡 건드리며, 내 가슴이 겉보기에 매우 탱탱해 보인다고 했다.”/ “사장은 한 손으로는 내 오른쪽 가슴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데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던지.... 사장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예쁘고 잘 꾸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며, 내가 틀림없이 꽉 끼는 유니폼을 좋아할 거고, 나에게 매우 잘 어울릴 거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화자는 저항 없이 일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할 뿐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순종하는 어리석은 희생양이다.


소설 속의 현실은 물론 풍자적으로 과장되어 있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통렬하게 드러낸다. 애인 관계를 넘어, 예뻐야 사랑받는 여성의 수동적인 사회적 위치.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져 본인의 능력보다는 외모에 집착하고 타인의 눈길에 값싼 만족감을 느끼는 여자들의 순진한 모습. 주인공은 일을 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동거남의 제안을 거부하고,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향수 체인점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게다가 손님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기는 동료들에 비해 회사에 충실하고 정직한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한다. 저임금에 초과시간으로 허덕이면서도 사장님이 자기를 특별히 예뻐한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참아내는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순진한 노동자의 초상이다. 이렇게 어리석게 당하면서도 타인의 작은 관심에 즐거움을 느끼는 그녀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쓰럽다.


향수 가게에서 일하면서 화자의 몸은 점점 돼지로 변해간다. 살집이 오르고 그녀의 가슴 및에는 네 개의 다른 젖꼭지가 생긴다. 더 이상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으로 시작해 천천히 채식으로 돌아서게 되며, 차츰 돼지로서의 본능을 경험하게 된다. 진흙탕을 보면 구르고 싶고, 땅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나 밤을 주워 먹고, 아침에 들려오는 새소리가 마냥 반갑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이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소설은 남성중심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에코 시스템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풍자는 양날의 검이다. 본인이 속한 사회에 어떠한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순종하며 안일하게 살아가는 (어쩌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자는 서서히 인간의 존엄을 잃는다. 주인공은 돼지가 되어가며 노숙자의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엽기적인 정치 행각을 벌이는 미래의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는 파라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 인물의 내면 상태가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 사실 영화화되면 어떨지 잘 상상이 안 간다. 2011년, 알프레도 아리아스 Alfredo Arias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연출가 겸 배우에 의해 파리에서 연극으로는 상연되었다. 어떤 일인극 퍼포먼스였을지, 소설 특유의 풍자적 유머감각을 어떻게 살려냈을지 궁금하다.



<암퇘지 / Truismes> 의 연극 티저


https://www.theatre-contemporain.net/video/Truismes-teaser-1-La-Glamo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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