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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Oct 06. 2019

9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https://www.youtube.com/watch?v=U9a1C1qXHfM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가 나오고, 재채기가 나올 때마다 콧물이 줄줄 흐른다. 거기다 눈까지 간지러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증상을 검색해보니 알레르기성 비염과 결막염인 것이 확실하다. 날이 차가워지면 나아지겠거니, 제발 나아지기를, 그래서 병원에 갈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지만 다음 주에도 이 증상이 지속되면 병원에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년까지는 몰랐던 ‘것’(고통이라고 하자니 너무 거창하고 증상이라고 하자니 너무 괴로워서 일단 ‘것’이라고 한다.)을 2019년 가을에 겪으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새삼 느낀다. 좋은 음식을 먹고, 충분히 운동을 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 한두 개가 ‘나 여깄지롱.’ 약을 올리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이 시간이 아쉬운 동시에 이 시간이 지나가야 내 몸이 안정을 찾을 거라 생각하니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 인가 싶다. 9월은 내게 무심했던 한 달이었다. 채워지지 않은 일기장을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추석을 지내기 위해 부산에 다녀왔고, 일 년에 두 번 보는 친척들과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잔잔한 감정의 파동, 멜랑콜리를 느꼈다. 매번 다음 번 부산에 내려 올 때는 뭔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내려가야지 하는데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내 처지에 부끄러움과 미안함만 한가득이다. 올라올 땐 고마움이 더해져 이 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결심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지난 몇 달 동안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던, 아마 기한마감이 없었다면 평생을 고치고 있을지도 모를 글을 겨우 완성해서 공모전에 제출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지만 큰 기대는 않는다. 이걸로 충분해... 따위의 자기만족도 않는다. 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주말마다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한쪽에서는 촛불을 한쪽에서는 깃발을.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둘로 나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의 이 지독한 진통이 결국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믿는다. 한국인의 국민성에 대해 이런 저런 자조 섞인 농담들을 나 역시 하지만 촛불로 가득한 유쾌한 집회 현장을 보면서는 이들에게 존경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K9QjEtsMmuo


<숨그네> 헤르타 뮐러


“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들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만성이 된 굶주림을 뭐라고 해야 할까. 병적인 허기를 만드는 그런 굶주림이라고 해야 하나. 허기 위에 그보다 더한 허기가 겹친다. 공복을 먹고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허기가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되고 길들여진 허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면. 입천장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두개골에 닿을 지경이면 천장이 둥근 교회처럼 조그만 소리도 크게 울린다.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면 입천장이 당긴다. 갓 잡은 토끼 가죽을 말릴 때처럼 누가 얼굴 피부를 아래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다. 불은 푹 꺼지고 그 위를 창백한 솜털이 뒤덮는다.”


“점호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크지 않아야 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떴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세계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소련에 넘겨야 했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5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한 레오라는 독일인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혹독한 추위와 지독한 배고픔, 그리고 끝도 없는 노동. 수용소의 참담한 모습을 시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작가가 묘사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퍼뜩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은 여러 영화들을 참고하면서. 그 그림이 그려지면 숨이 턱 막힌다. 그렇지만 공포스럽지는 않다. ‘산다’는 것은 ‘어떻게’가 무색할 만큼 본능적인 것이다. 처절한 동시에 아름답다.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안고 오스트리아로 다시 망명 아닌 망명을 한 동성애자 레오의 쓸쓸한 산책을 상상하면 서늘하게 내려앉은 가슴이 커다란 돌멩이가 되어 발끝에서 처절하게 끌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U3YZTYXftzg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한 소녀가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한다.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위탁가정을 전전해 온 고아다. 형사들은 소녀에게 갖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현장에서, 경찰서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강간 피해자답지 않게(?) 너무도 차분한 모습, 예전에 관심을 받기 위해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는 위탁가정 보호자의 증언, 그리고 반복된 질문에 어긋난 대답을 근거로 형사들은 소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형사들은 소녀의 대답이 앞뒤가 맞지 않다며 강간을 당한 게 맞기는 하냐며 소녀를 몰아세운다. 소녀는 혼란스럽다. 어느 순간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범죄자가 된 것만 같다. 평생을 약자로 살아온 소녀는 형사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로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면 자신을 괴롭히지 않겠지. 집에 가서 쉴 수 있겠지.

하지만 소녀의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소녀를 위로했던 친구들은 그녀를 끔찍한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며 무리에서 배제시킨다. 소녀의 이름과 얼굴까지 공개되어 어딜 가든 비난 받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 모든 부당함을 받아들이고 소녀는 꿋꿋하게 살아간다.


시간이 흐르고, 소녀에게 가해졌던 방식과 유사한 범죄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다. 증언을 듣고, 검사를 하는 등 같은 수사 방식이지만 피해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르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수사가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 강간범은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지역을 옮겨 다니며 범행을 저지른다. 지역이 다르면 관할경찰서가 다르고 경찰서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집념으로 똘똘 뭉친 두 형사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처음에 등장했던 소녀 역시 그의 피해자였음이 밝혀진다.


보는 내내 안타까움에 가슴이 떨렸던 드라마다. 시스템의 한계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안전하고 안정된 사회를 위해선 시스템이 중요하지만 이 시스템을 이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마리가 당했던 부당함은 범죄 이상의 폭력을 가하지만 사회적 약자로서 마리가 택한 방법은 최대한 약자로 머무르는 것이다. 나 자신을 극중 인물에 대입해본다. 내가 마리라면. 내가 마리의 위탁가정 보호자라면. 내가 마리의 친구라면. 내가 형사라면. 내가 또 다른 강간 피해자라면. 내가 마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상상만으로 괴롭고 화가 차오른다. 그녀처럼 버틸 수 있을까? 슬픔과 대견함에 눈물이 고인다.



뮤직비디오 리스트


1. Antony and the Johnsons - "Cut the World"

2. Belle and Sebastian - "Sister Buddha"

이번 달 노동요

3. M83 - "Go!" (feat Mai Lan)

m83 새앨범이 실망스러워서 옛 노래로 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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