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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Nov 03. 2019

10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https://www.youtube.com/watch?v=3XqqkrJENB4


10월이 참 예쁘다. 햇살도 바람도 온도도 모두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한다. 아무리 걸어도 덥지 않고, 아무리 밖에 있어도 춥지 않은, 곧 다가올 겨울에 조급해진 마음이 몸을 밖으로 이끈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아쉽지만 서운하지는 않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도록 그렇게 둔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설렘으로 어제의 흔적에 조차 무심했던 지난날들의 무지와 독단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올해는 얼마나 추울까? 미세먼지는 어떻고. 그리고 또 다가올 더위는.... 에휴. 정말 지루하고 또 지루한 고민들에 내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내 설렘을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단련한다.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폴 세잔-


1.커피

커피를 공부하고 있다. 커피의 역사에 대해, 원두의 종류에 대해,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기본적인 것들만 배우고 있지만 커피의 세계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이 과정이 꽤 즐겁다. 커피가 주인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던 나는 보다 맛있는 커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그 집요함에 매일 놀란다. 


공부의 연장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각각의 원두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맛과 향을 아직은 모두 느끼지 못해서 그 카페만의 특별함을 커피에서 찾기는 힘들지만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좋은 공간’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한다. 내게 좋은 공간이란 편안함과 자극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일상 속 영감을 주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지만 그 생각은 언제나 막연한 바람으로만 머물렀다. 그 이유는 그 공간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윤을 창출해야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거기에 갇혀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커피 주위를 서성이기만 하고 있다. 과연 내가 바리스타가 될 수 있을까? 카페 주인장은? 음... 

https://www.youtube.com/watch?v=etVNNMpckcE

cc

2. 미래

테리 길리엄 감독의 <12몽키스>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암울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해를 끼치는 바이러스로 전멸하다시피 한 인류.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지하로 숨는다. 지하세계는 기괴하고 불쾌하다. 결코 살고 싶지 않은 미래의 살아남은 자들은 지상 복귀를 위해 온갖 방법(시간 여행)을 동원한다. 시간 여행이 암울한 미래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엄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는 감옥에 오랜 세월 수감되어 있던 제임스 콜(브루스 윌리스)이란 자다. 이미 감옥과 다름없는 지하에서 감옥은 지옥이다. 그 안에서 제임스는 평생 악몽을 꿔왔다. 과거 어린 시절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장면을 매일 밤 꿈속에서 보는 제임스. 그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란 것을 그는 모른다. 그는 진실(진실 앞에서 그의 존재는 무력하다.)을 모른 채 과거를 반복한다. 그것이 인류의 운명일까? 


만약 아포칼립스가 온다면 한 명의 싸이코패스가 아닌 무지하고 비겁한 전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미래의 살아남은 인류가 구원의 결정적 지점으로 지정한 순간들을 수차례 무시해 넘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넘기기엔 이 아름다운 지구가 너무 아깝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qiPsYG8B4

3. 다큐멘터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우먼 인 헐리우드>와 <삽질>. 두 작품 모두 오늘을 사는 (한국)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만듦새가 몹시 아쉬웠다.  

<우먼 인 헐리우드>

지금까지 미디어는 ‘여성’에 특정 이미지를 부여하고 역할 분배와 중요도에 있어 ‘성차별’을 행해왔다. 미디어의 성차별은 너무도 모호한 것이어서 문제제기를 함에 있어서도 설득 불가능한 지점들이 있었는데 배우 지나 데이비스가 설립한 재단이 만들어낸 GD-IQ라는 개념은 데이터로 이를 입증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의 등장 시간, 주목도, 대사 양, 중요도, 등등)

촬영 현장에서 여성 인력의 수는 남성의 수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적다. 여성이 열등한 존재여서? 아니다. 영화에서 증언을 한 여성 영화인들은 누구보다 다재다능한데다가 그들의 시작은 눈부신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남성 동료들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동안 그들은 무직인 상태로 머물렀다. 십년 만에 맡은 차기작이 흥행에 실패하면 그들의 ‘성’이 원인이 되었다. 영화가 취재한 영화인들은 구조적인 문제를 따져가며 법적으로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임금차이, 현장에서의 성차별)은 차치하고,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그 어느 곳보다 보수적이라는 사실에 영화를 보는 동안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우리 대중들이 여기에 특별히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거다. 오랜 세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학습된 것이다. 피해자는 우리 모두이고 가해자는 공석이다. 제발 싸우지 말고 함께 성장해나갔으면 좋겠다. 


<삽질>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영화는 성실하게 쓴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지난 10년간의 취재, 그 지난했던 과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하여 제작진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어째서 이토록 영화를 심심하게 만들었나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가 알아야하고 분노해야하는 문제이기에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는데 과연 관객이 얼마나 들지...

좋은 재료를 깨끗하게 씻어서 썰어만 놓고 “맛있게 드세요.”하는 것 같으니...


추신. mb는 여러모로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ClvMMxBg1k

4. 옥타비아 버틀러

<디스옥타비아>  유진목


나는 유진목의 문장들이 참 좋다. 읽기에 편안하고 여운이 오래간다. <디스옥타비아>는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일기 형식의 소설(?)로 2059년이라는 가상의 미래, 죽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플롯이랄 것도 내러티브랄 것도 딱히 없어 내용을 옮기기엔 무리가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우울한 동시에 조금 외로웠다. 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고, 차분한 감정 속에서 독서를 이어갔다. 


"그 시절 내가 한 일은 내가 겪고 있는 공포에 대해 꾸준히 글을 쓴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글을 쓰면서 실제로 그를 죽게 했다. 그런 뒤 내가 만든 세계에서 혼자 있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에게 묻곤 했다. 이것보다 행복하게 할 수는 없어? 좀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거야? 그럴 때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문득 고개를 돌리던 주름진 얼굴을 환영처럼 마주하곤 했다. 그때 만난 얼굴을 지금 나는 거울을 통해 보곤 한다."


"율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비롭게 여겼다. 그건 마치... 자기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려요. 내가 살아가는 데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죠?"


이 외에도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sf소설은 처음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다독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책을 고를 때 이래저래 평이 좋은 책들을 우선으로 골라 sf장르까지 손이 뻗칠 일이 잘 없었다. 유진목의 <디스옥타비아>를 읽다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읽었다. 단편 소설집인데 소설 하나하나가 훌륭하다. 그리고 마치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의 시놉처럼 감각적이다.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면서 내 스스로에게 놀란 점은 이 소설이 묘사한 주인공 소년과 거대한 곤충(인간보다 지능이 우수한 곤충) 트가토이를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화 할 때 자꾸만 소년은 소녀로, 트가토이(소설에서는 암놈이다.)는 남성의 모습으로 떠올렸다는 점이다. 작가가 이들에게 여성 혹은 남성의 캐릭터를 강하게 부여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소년이 출산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트가토이가 누구보다 강한 존재, 인간을 보살피면서도 인간의 몸이 없이는 종족 번식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이들의 성을 반대로 떠올린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녀는 각 소설 뒤에 짧은 후기를 남겼는데 <특사>라는 소설의 후기를 읽으면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기를 옮긴다.



"<특사>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웬호리 박사(대만계 미국인 과학자로 중국을 위해 기밀 정보를 훔쳤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후에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하여 보상과 당시 재판관의 사과를 받았다.)에게 일어난 일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이다. 1990년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이 한 사람의 직업과 자유를 빼앗고 명성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아직 충격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는 어떻게 이런 일이 만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음악 리스트(유튜브)**


1. Cigarettes After Sex - Cry

2. Cortex - La rue

3. FARR -Bulletproof

4. James Blake - Retrog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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