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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Dec 02. 2019

11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https://www.youtube.com/watch?v=u37RF5xKNq8

11.04. 월

cinema.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이었다?

과거형으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내 마음을 확인한다.

이미 오래전에 (내가 먼저) 단념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방적인 사랑에 또 한 번 시원하게 거절당했다.

실연의 하루. 이 하루가 또 얼마나 오래 갈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I’ll never stop loving you. 아이고 닭살이야 흐흐


11.09. 토

고등학교. 공덕에 있는 서울여고에서 ‘바리스타 2급’ 필기시험을 치르고 왔다. 이틀 동안 서울에서만 세 개의 고등학교에서 치러질 만큼 규모가 상당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서울여고를 빽빽하게 메웠다. 시험시간은 한 시간. 풀어야 할 문제는 50문제. 십분 만에 문제를 다 풀고 답지 제출이 가능한 30분까지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본 것이 얼마만인지 옛 생각에 젖었다. 교실 천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 덕분에 외투를 벗고 가벼운 상태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 그러니까 나 때는 겨울이면 손이 얼어 필기를 하기가 힘들 정도로 추웠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하면서. 추워서 몇 달 동안 빨지 않은 더러운 체육복을 치마 안에 입고 항의의 표현이랍시고 오지도 않는 잠을 자겠다고 어깨에 담이 걸릴 정도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을 만큼 어리석었던 나의 십대. 학교가 지루하고 답답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나의 옛날이 떠올랐다. 둥둥 떠다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과거는 추억으로 미화되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11.10. 일

카페쇼.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카페쇼’에 다녀왔다. 대단한 규모, 그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 놀랬다. 무엇을 봐야할지 몰라 헤매다가 그냥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산책한다 생각하고 걸으며 다 봤는데,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놓친 것들이 있었다. 혼자여서 좀 아쉬웠던 게 시음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혼자 기다리자니 뻘쭘해서)에 동참할 수 없었다는 것. 에어로프레스를 꼭 구입하고 싶었으나, 오만 커피 용품들 사이에서 에어로프레스는 없었다는 것. 내가 구입한 것. 코스타리카 따라주 원두, 커피학원 짝꿍들에게 선물할 드립백, 그리고 애껴 마실 루이보스 차.


https://www.youtube.com/watch?v=p4cJv6s_Yjw

11.14. 목

시골인심. 바지락 칼국수를 주문했는데 홍합 칼국수가 나왔다. 국물이 삼삼하니 맛있어서 아무 말 않고 먹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밥도 드실라요?” 물었다. 우리는 괜찮다고 했고, 할머니는 잠시 후에 팥죽 한 그릇을 갖다 주었다. 맛있어서 배가 몹시 불렀지만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주인 할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11. 16. - 11.22

외할머니와 이모. 서로에 대한 연민과 원망이 뒤섞여 온 몸에 가시 꽃을 피운다.


루. 귀엽다는 건 엄청난 일. 너의 귀여움은 우리의 축복.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전달하는, 도대체 비결이 뭐니?


알러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지면서 새로 오는 것들은 유독 유난을 떨면서 티를 낸다. 덜 매력적이고 성가신 일들이 늘어간다. 젠장.


11.26. 화

고민. 고민도 정성들여 해야지. 따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친구. 1년 만이라 해서 놀랐다. 1년 전과 오늘. 그와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11.28. 목

도시플레이어. ‘지금, 당신은 어떤 플레이를 하고 있나요?’ 서울문화재단에서 주최한 도시문화에 대한 포럼. 무료로 참석 가능한데 내용이 꽤나 양질이어서 놀랐다. 1회와 2회에 참석해서 들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김정후 교수의 ‘도시의 장소적 특징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정재은 감독의 ‘갈등의 도시를 기록하는 방법’, 그리고 김시덕 교수의 ‘대서울을 걷고 해석하기 위한 몇 가지 쟁점들’ 강연이 무척 흥미롭고 내게 여러 질문을 던지며 하나의 주제에서 여러 주제로 확장되어 좋았다. 어떤 화두를 가지고 도시를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화두를 가지느냐는 단지 하나의 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그 도시를 구성하는 모두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중요하다. 흉측한 무기고가 미디어의 메카가 되고, 도시 전체가 친환경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은 정책과 문화가 결합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정재은 감독이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하고 작업하면서 관찰한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강연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관찰한 도시, 온갖 욕망들이 충돌하는 갈등의 공간이 가지는 한계와 가능성, 그에 대한 질문들에 그의 영화(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음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마트를 지칭하는 단어가 140가 넘는다는 것을 아는가? 그 중 ‘슈퍼마켓트’는 대한민국에 단 두 곳, 대전과 부산에 남아 있다고 한다. 동네의 간판 철자를 보면 그 동네가 언제 부흥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새로운 접근, 적어도 내게는, 이 흥미로웠다. 서울 근교, 경기도, 경계지점에 대한 김시덕 교수의 연구에 ‘일단은’ 관심이 가서 조만간 그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AF_CJhpTzQ

<킨> 옥타비아 버틀러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것이 ‘한계’일 수 있을까? 아니, 여전히 한계 일까? 우리는 ‘차별’을 극복했을까? 흥미로운 서사가 무거운 주제의식이 가라앉지 않도록 살려주는 대단한 소설이다. sf라는 장르 안에서 지독히도 현실적인 묘사들이 21세기 한국 독자가 완전히 몰입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  니시카와 미와

엄마의 강력한 추천으로 읽게 된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산문집. 솔직하고, 담백하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한 감독의 태도가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엄마의 추천이 괜한 것이 아니군, 재밌게 읽었다.



music list

1. Cannonball Adderley - Autumn Leaves

2. Elliott Smith - Between The Bars

3. Beck - Uneventful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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