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jwk Oct 08. 2020

9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septembre

https://www.youtube.com/watch?v=Bv-1BnoB75k

joji-like you do


하나의 사건으로 세상이 급격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코로나’를 통해 처음으로 절감하고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바뀌고 있는 세상. 그 속도에 비례해 망가지고 있는 지구 환경. 그것들이 내 삶에 끼치는 영향 역시 엄청나겠지만 기술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덧셈 다음에 곱셈을 배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어떻게 가능한지 여전히 신기하고 이해는 못하지만), 환경파괴는 늘 자각하고 반성하고 노력하려 하지만 어쩐지 멀게 만 느껴진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로 내 삶이 얼마나 바뀌었느냐? 

개인위생에 전에 없던 신경을 쓰고 마스크를 쓰는 것 말고? 당장은 다행히도 그것밖에 없지만 곧 나는 코로나의 영향아래 바뀐 세상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왠지 이 변화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나는 내 역할에 충실히 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9월이었다. 너무도 적은 성공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실패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아 앞을 나아가는 걸음들. 특히 여성들이 흘린 피, 땀, 눈물에 대해서. 9월에 내가 본 것들의 영향이겠지. 

지인의 추천으로 미드 <핸드 메이즈 테일>을 보았다. 드라마는 마가렛 애트우드의 1985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설정이 한 마디로 골 때린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다 있어 하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길리어드’라는 나라를 만든다. 그들은 저조한 출산율과 환경오염을 극복하기 위해 시대를 역행해 진정한 가치를 위한 작은 희생이라는 설득력을 가지고 군주시대 때보다 더한 악행을 저지른다. 

길리어드는 지도자층. 서민층. 시녀(가임기의 젊은 여성)와 하녀, 콜로니 노동자들로 인간을 구분한다. 이들은 옷으로 구분되며 신분에 따라 자신의 역할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한 때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살던 이제는 시녀로 살아가는 여자다. 이 여자의 역할, 즉 임무는 자녀가 없는 지도자층 가정에 들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설정이지만 드라마 속 여성들이 겪는 폭력은 우리가 이전에 모두 겪어왔던 일들이며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들이다. 허구인 동시에 우리의 과거이자 누군가에게는 현재라는 생각하면 드라마의 재미와 비례하여 마음이 무거워진다.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연달아 읽었는데 드라마가 소설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각색을 잘 했다. 소설은 소설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매력 있는 작품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죽고서 <세상을 바꾼 변호사>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친숙했지만 그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대단한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는데(지금이라고 뭘 알겠냐 만은)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루스라는 사람은 놀라운 지성과 지독한 근성,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자질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지 감탄도 했지만 불과 50년 전 세상이 어떠했는지, 남녀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 그 무자비함이 어떤 것인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으로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 그것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희생은 너무도 크다. 하지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하고 이미 실패의 마음으로 주저앉지 않고 기꺼이 피를 흘려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피를 마시고 조금 더 힘을 내려고 한다. 이것은 단지 남녀 차별이나 인종 차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용기일 것이다. 


참 예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해는 쨍쨍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어디든 싸돌아다니다가 노천카페에서 맥주 한 잔 들이 키고 음악에 맞춰 밤새도록 춤을 춰야 하는데... 그러면 나는 세느강을 기억하고 룩셈부르크 공원을 기억한다. 마드리드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의 세르베자를 기억하고 그라나다에서의 아찔한 햇살을 기억한다. 내 추억의 일부를 꺼내서 과거가 현재를 위로하도록 아니, 위로는 아니고 삶에 대한 허기를 잠깐이나마 달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추억은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 낭만의 느낌만 쏘옥 빼먹고 그때의 복잡한 감정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물론 지금이라고 끝도 없는 산책과 대화, 맥주와 음악, 그리고 웃음과 춤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내는 대상, 그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음... 그러니까 나는 좀 외롭고(이 외로움이 처절하다거나 싫은 건 아니고) 함께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데 함께하는 귀찮음과 골치 아픔을 감수(감수? 라는 말은 너무 건방진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하면서까지 좋은 사람을 만난 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그러다보니 과연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고, 좀 지루해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고... 이런 게 뭐? 어쩌라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가 시간은 자꾸 흐르고... 뭐 그런... 가을이 또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8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