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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Feb 19. 2024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겨울의 뒷모습을 보면서 추운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 내내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추위가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낯선 길을 걷고 싶고, 뜨거운 핫초코를 호호 불어가며 홀짝거리고 싶다. 저녁이면 따뜻한 조명이 있는 식당에 들어가 언 몸을 녹이며 뜨거운 술을 마시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상상한다. 상상은 감정의, 감각의 착각을 몰고 온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서리 낀 유리창 너머 바깥 풍경이 흐릿해지면 언제 온 지도 모르는 밤이 영원히 그곳에 머물 것만 같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나는 모르지만 그 사람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밤을 함께 보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몽글거린다.


그곳에 가면 내게도 낭만이 올까?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했다. 11월부터 아이는 성탄 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 토요일 오후를 성당에서 보낸다.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한다.  준비하는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설렘도 커진다. 매번 어긋나던 동작들이 합을 맞춰가고, 성당 장식이 더해지고, 의상을 준비하고, 최종리허설을 하면서 마치 세상의 중심이 이곳인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공연을 하고, 박수갈채를 받는다. 아이는 진심으로 행복하다. 즐겁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고 느낀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아이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산타할아버지가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침대에 누워 푸른빛 천장을 바라보며 몇 시간 전 공연을, 준비 과정을 생각한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조금 전만 해도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는.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 머리맡에 놓여있을 선물 생각을 한다. 울렁거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아이는 잠 속으로 빠져든다.


크리스마스 아침. 아이는 선물을 받아서 즐겁다. 산타의 존재를 아이가 믿은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애초에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거짓인걸 알면서도 믿는 판타지.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판타지. 아이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했다. 아이는 일 년 365일 중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의 생일 보다도 더. 왜냐하면 온 세상이 작정하고 만들어낸 판타지에, 그 마법에 취할 수 있으니까.


탱탱하게 조여진 설렘은 언제나 싱겁게 헐거워졌다. 아이는 허무했고,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왠지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은데. 그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 산타할아버지의 선물도, 크리스마스 전야제도, 결국엔 지나가는 것일 뿐.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매년 겨울이 오면 바짝 얼어붙은 살갗 아래 뜨거운 혈관이 빠르게 심장으로 몰려든다. 두근거림. 길가에 울려 퍼지는 캐럴, 전구를 두른 사철나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노점, 붕어빵 봉지, 종종걸음, 입김으로 피어나는 흥분, 마무리, 인사, 작별, 새로운 시작, 눈물과 설렘, 타인의 온기, 따뜻한 실내, 안전하다는 느낌, 포근함, 내 몸을 누르는 이불의 무게, 외투의 무게, 무거움이 아닌 안정감. 겨울이 주는 것들.

무엇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을 기다리는 마음.


기다리는 아이는 내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 한때 내 것이었으나 아니,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내 것이 아닌 것, 내 것이 아니라고 깨달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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