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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Sep 25. 2017

[순풍 산부인과]보며 혼밥하기

<순풍산부인과>  682부작. 1998년 3월 부터 2000년 12월 까지 SBS에서 방영한 시트콤. 

시트콤 역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와 수 많은 유행어 탄생.



혼자 살 때 가장 곤욕인 것 중의 하나가 식사다.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일부터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기까지 투자되는 시간과 정성이 어차피 혼자 먹을 음식에 과한 노력이 아닌가 싶어 인스턴트로 한 끼 때우기 일쑤다. 더군다나 한 시간 요리해서 십분 만에 끝나는 식사시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한데 그래서 나는 식사시간을 함께 할 볼거리를 늘 찾는다. 놓치고 지나간 예능프로나 누군가에게 추천받은 미드를 보면서 반주로 맥주 한 캔까지 곁들이면 내 썰렁한 식사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근 방송국의 파업이 이어지면서 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결방도 계속되고 손꼽아 기다렸던 <왕좌의 게임> 시즌7도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하던 일이 예상치 않게 빨리 마무리 되면서 나는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재밌고 분량도 적당한 볼거리가 뭐가 있을까...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발견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지만, 가상의 인물에게서 애정을 느끼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보다 친근하고 편안한 볼거리를 원했고 그래서 며칠 전부터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전설의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고, 이미 다 아는 캐릭터 이지만 20년 전 방영된 이 시트콤 속의 생활상들을 보면서 90년대 대한민국을 공부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다시 보는 90년대는 친숙하고도 낯설었다. 


막내딸 혜교의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보면서 저때는 저런 게 유행이었구나. 그래도 혜교는 변함없이 예쁘네. 하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태우는 지명과 영규를 보며 맞다! 전에는 TV에서 흡연 장면이 나왔었지. 그래. 흡연 장면을 빼네 마네 한동안 말이 많았었어. 신기해하기도 한다. 매번 깐풍기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는 오중네를 보면서 우리 집도 처음으로 깐풍기라는 걸 시켜 먹어봤고, 병원 사람들이 여름이면 올해 여름은 정말 너무 덥다. 어떻게 점점 더 더워지냐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매년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저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구나 한다.


나도 이제 과거를 추억하는 세대가 됐다. 90년대에 대한 특별한 향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벌써 20년이나 지났나... 하고 다시 보는 시트콤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변했고 그 안에서 사람들 또한 얼마나 변했는지 보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오중이네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영규- 시대를 초월하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와 미달이를 보면서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친구네 집에 예고 없이 찾아가는 게, 식사 중에 수저 하나 더 놓고 함께 밥 먹는 게 별게 아니었구나 싶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내가 기억하는 기준이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00아 노올자! 하는 소리가 아파트 복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고, 심심하면 무작정 친구네 집에 찾아가 벨을 누르고 사람이 없으면 그 집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적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이사떡을 돌리는 게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고, 답례로 과일을 보내기도 하고 그랬으니...그리고 한 번은 현관문을 열어 놓은 적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줌마들이 집 인테리어가 예쁘다며 들어가서 구경 한 번 해봐도 되냐고 한 적도 있었다. 그 아줌마들이 거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것이 기억난다. 나의 엄마는 그 아줌마들과 잘 맞지 않았는지 그 후로 그녀들을 우리 집에서 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예고 없는 벨소리가 울리면 누구세요? 하고 나가보지도 않는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말은 이미 너무 당연한 말이 되어버렸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안녕하세요? 인사하지 않는다. 원룸에 사는 나 또한 옆집 사람의 목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옆집사람이 궁금하고 알고 싶고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옆집 사는 사람이 내게 관심을 표하면 나는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옆집 사는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하소연 할 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옆집 사람과 어쩌면 SNS상에서 서로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는 친구사이 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도 쉽게 툭툭 내뱉는 말들을 혐오하지만 <순풍 산부인과>속 오지랖들이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늘 혼자 밥 먹는 자취생의 외로움 + 20년 전이 주는 향수 + 알고 보면 따뜻한 관심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오지랖 때문일 것이다.


시트콤이니 상황도 캐릭터도 과장됐지만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영규처럼 염치없는 행동을 한 적은 없을까? 반성하기도 하고 염치가 없어야 영규지, 그래야 재밌지 하면서 깔깔 거리다가 그런 영규가 고맙고 혹여 누군가 영규처럼 굴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까지 생각은 이어진다.


총 600회가 넘는 에피소드. 마음이 든든하다.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 없이 개성 있는 캐릭터부터 재치와 풍자가 넘쳐나는 이야기까지 <순풍 산부인과>는 한동안 나의 밥 동무로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나의 찬사와 애정은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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