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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Sep 27. 2017

화장실 문이 잠겨버렸다.

지난 밤, 화장실 문이 잠겨버렸다.

에? 무슨 일이지?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문을 당기는데 이 놈이 꼼짝을 안한다. 설마 잠겼을라고... 혼자 사는지라 화장실 문을 잠글 일이 없는데, 그래서 톡 튀어나온 잠금 장치를 실수로라도 건드려 본 적 없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지만 문은 잠겼고 화장실 열쇠는 없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 시간에 출장 수리를 부르면 가격도 만만치 않을테고, 일단 지식인에 물어보자.

‘화장실 문 잠겼을 때’ 빳빳하고 얇은 플라스틱을 밀어 넣어서 내려치기, 손톱깎이에 달린 얇은 칼로 걸어서 당기기. 그래,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빠리에 있을 때 열쇠를 두고 나온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파일 커버로 문을 열었던 때를 기억하며, 화장품 멤버 쉽 카드를 밀어 넣고, 안 되서 다른 카드를 또 밀어 넣고, 카드의 네 모서리가 너덜너덜 해질 때 쯤 간절한 마음을 손 끝에 모아 플라스틱 파일지를 밀어 넣었지만 화장실 문은 꿈쩍을 않았다.

만약 내가 헐크였다면 ...

조급함과 함께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도둑들이 쓰던 실핀을 열쇠구멍에 집어넣고 요리조리 돌려봐도, 꿈쩍을 않는 문이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아, 씨... 재수가 없으려니 진짜 별 일이 다 생기네. 열쇠구멍에 칼을 밀어 넣고 이리저리 돌려봐도 걸쇠는 풀릴 생각이 없었다. 문손잡이에 대한 나의 가학은 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칼을 쑤셔 넣었더니 열쇠구멍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공구로 쓸 만한 것들을 모조리 꺼내서 차례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젓가락, 가위, 드라이버, 다시 칼. 샤워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티셔츠가 땀으로 젖기 시작했고 성질 같아서는 문을 아예 뜯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곧 후회할 것을 알기에 심호흡을 하고 문손잡이를 집중해서 바라보면 뭔가 수가 떠오르지 않을까 노려봐도 수리공을 부르는 길 밖에는 없어보였다. 야간 출장비가 걱정이라면 아침까지 기다리자. 내가 손을 대면 일이 더 커질 뿐이다. 맞다. 그때 깔끔하게 포기하고 자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갑자기 이상한쪽으로 튀어, 아니, 잠깐. 어차피 문고리가 망가진 것 같으니 손잡이를 아예 떼어내자! 인터넷에 싼 문고리 많으니까 내가 사서 갈아 끼우면 되지. 그런 멍청한 생각은 왜 또 떠오른 것인지...


다시 ‘문손잡이 해체시키는 법’을 인터넷에 물어본다. 인터넷에서는 동그란 옛날식 손잡이 대에 동그란 구멍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건 잠그는 쪽 손잡이에 해당되는 말이고 바깥쪽 손잡이에는 손잡이를 분리시킬 그 어떤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내리쳤다. 망치도 없고, 송곳도 없고 펜치도 없었던 지라 칼과 드라이버 등 내가 가진 도구를 최대한 활용해서 말 그대로 손잡이를 뜯어냈다. 하지만 애초에 안 될 일이었는지 바깥 족 손잡이만 뜯겨지고 걸쇠에 단단하게 걸린 부분부터 잠긴 쪽 손잡이는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 손가락이 아파서 이제 더 이상 힘을 쓸 수도 없고 화장실 앞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고 청소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아침을 기다리자. 이 생각을 몇 시간 전에 했으면 좋았으련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몇 시간을 낑낑거렸는지 모르겠지만 피로가 갑자기 밀려왔다. 일만 크게 벌이고 힘은 힘대로 쓰고 나중에 돈은 더 들게 생겼네 싶으니 내 인생도 이 문고리처럼 꼬인 것 같아 울고 싶었다. 나는 뭔가 해보려고 그래도 나름 낑낑거렸는데 말 그대로 낑낑거리기만 했지 뭐 제대로 한 것 없이 시간만 흐르고 힘은 다 빠지고 아무 실속도 없는 것 같아서 한 없이 우울해지려는데, 다행히?도 너무 용을 썼던지라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이 왔다. 집에서 가까운 열쇠집에 전화를 걸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수리공 아저씨는 엄청나게 무거운 장비 박스를 들고 와서는 화장실 문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일을 더 만들어버렸구만~ 당황했겠네.

네...

문이 왜 저절로 잠겼는지 뭐가 고장인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침부터 기분이 다운되어있어 입을 떼기가 싫어서 아무 말도 않았다.

공구 박스에서 아저씨는 망치과 엄청나게 견고해 보이는 펜치를 꺼내서 치고, 돌리고 잡아 당기, 무시무시한 공구를 가지고도 이십여분간 힘을 쓴 끝에 손잡이를 완전히 빼내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와~

손잡이가 있어야 할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것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아가씨가 혼자 돈 아껴보겠다고 애쓴게 보여서 기본 출장비만 받을게요. 더 받아야 되는 거 알죠?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나가자마자 시원하게 오줌을 눴다.

어젯밤에는 울고 싶었고,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우울해서 입을 떼기가 싫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괜찮았다. 난장판이 된 화장실 앞을 보면서 그래, 청소 하자.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하고 아침을 만들어 먹었다.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어떤 때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화장실 문손잡이는 뻥 뚫린 채 속이 훤히 보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가씨가 혼자 몇 시간 동안 애썼을 게 보여서 기본 출장비만 받을게요.

이 말에 내 하루의 시작이 흐림에서 맑음이 되었다. 오버하고 있네, 할 수도 있겠지만 이해받고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힘들 때는 밥 먹다가 라면국물이 셔츠에 튀기만 해도, 병뚜껑이 열리지 않아도 인생이 꼬이니까 별게 다 시비를 거네, 싶지만 산책하는 강아지가 킁킁 거리며 나에게 다가온다거나 과일을 사는데 아저씨가 덤으로 자두 하나를 더 넣어준다거나 고개를 들었는데 하늘이 말도 못하게 예쁘다거나 그런 정말 별거 아닌 걸로, 위로 받고 기운을 내고 한다.


곧 문고리를 사서 설치를 해야 한다.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 쉽게 될 수도 있고, 또 몇 시간 동안 낑낑거려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귀찮아서 한동안 뻥 뚫린 구멍에 걸어놓은 끈을 손잡이로 쓸 수도 있다. 당분간은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떻게 문이 잠긴 건지 모르겠지만, 전날 밤 화가 나고 그냥 서러워서 문짝을 발로 차고 부수고 싶었던 것을 참았던 내 자신을 대견해 하며 오늘 밤 맥주의 건배는 그걸로 해야겠다 싶다.

용쓰느라 욕 봤고, 참느라 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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