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내 것들로
길을 열고 그 위를 걷기 위해서는 가는 방향과 목적을 먼저 정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쓰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시간은 꽤 비중이 컸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의 길이 되리라 믿어왔었다. 하지만 끝까지 가본 사람처럼 목표와 과제를 알고 시작하지는 못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더 집중하고 파고들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식을 하며 지내고 있는 정도였다. 그 의식이 확장되고 내 발걸음에 무게를 실을 수 있었던 건 내게 의미 있는 조각들을 내려놓지 않고 기다린 때였다. 그제야 그 조각들이 어디서 깨져 나온 부스러기였는지 알 수 있었다. 매체와 콘텐츠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 평소에 글 쓰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것과 같은 작은 힌트 조각들이 모여서는 스스로에게 지침이 되어주었다.
글을 쓸 때 집중력을 모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논술 수업을 받을 때였다. 항상 유쾌하게 만 학생들을 대해주시던 선생님이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내가 숙제로 써온 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인지 물어봤던 걸로 기억이 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잘 연결 지어서 한정된 글자 수안에 하고자 하는 말을 써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었다. 선생님은 내 글이 나쁘지 않으니 앞으로도 책을 읽고 요약하는 숙제나 주제가 있는 글쓰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잘해보라고 건투를 빌어주셨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장점을 잘 봐주셨던 그 논술 선생님 덕분에 시간이 지나서도 자신감을 놓지 않고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어린 시절에 권장도서를 기록 깨듯이 읽어 나간 국어 천재 같은 유형은 아니었다. 주어진 숙제들 중 하고 싶거나 흥미가 있을 때는 몰입하고 억지로 해야 할 때는 대충 때웠던 평범한 과거가 있었다. 그 평범함 중에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도 몰랐던 나의 한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숙제에 해당하는 글을 제외하고 가장 힘주어 썼던 글은 고등학교 때 만난 선생님께 쓰는 편지였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스승의 날에 예쁜 편지지에 써 내려간 고운 내용은 아니었다.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생의 몫으로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청소년이었다. 기말고사 시험문제지 주관식 란에 학교와 수업의 방향성에 대한 아쉬운 점을 논증한 글을 남겼다. 학교가 학생들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문제의식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고자 했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반항이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선 깊게 고민하지 않고 저질렀던 일이었다. 그 행동 자체만 놓고 봐서는 어리석은 시도였고,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과거의 내가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드러내고 싶었던 문제가 공론화되고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 시험지라는 매체를 활용했었다. 결국 선생님들에게 읽히기는 했으나 그 내용보다는 행위에 대한 관리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다. 지금으로서는 심려를 끼쳐드린 선생님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이고 모자랐던 나의 판단에 반성을 하게 된다. 그 사건으로 아무리 필요한 비판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처와 고통을 안길 수 있다는 생각에 신중함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는 배움을 얻었다.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지도 않고, 충분한 가치를 지니며, 오히려 생산성을 창출하는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어린 고등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는 부조리가 너무 많았고, 공격받아야 마땅한 악폐습이 잔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만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조차도 의인이 아닌 이상,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돌 만 던질 수는 없다는 걸 인식했다. 나름대로는 더 나은 모습을 추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의 톤이나 논조 같은 걸 조절하고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필요도 있었다. 다른 이의 입장이 돼서, 그 사람이 읽었을 때도 기분만 나빠지는 글이 아니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스스로 만들었다.
복잡한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내 길이 열리도록 조금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실용학문보다는 순수학문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입시를 위한 다른 수업들보다 논술 시간에 질문하고 사고하고 글 쓰는 행위에 대해서 더 몰입했던 나를 발견했고, 더 탐구하고 싶은 학문에 대해 다가가도 좋은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학마다 요구하는 논술 시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짧은 동서양 철학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고, '나는 누구인가'처럼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질문에 간단한 답을 제출할 수는 없었다. 건설적인 이야기, 생산적인 글쓰기, 언젠가는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단계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공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결국 대학에 합격하고 원했던 인문 관련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입학 전 겨울, 고등학교 시험 문제지에 썼던 비생산적이고 무례했던 글이 아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글을 만들고자 한 편의 영화 리뷰글에 도전했다. 이참에 한 번에 써봤다가 너무 좋은 결과가 나타나서 위대한 작가가 탄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기대를 걸었던 그 꼬마는 한 문단 만을 적고 더 이상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컴퓨터 화면을 꺼버렸다. 스타가 탄생하지 못했음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빨리 깨닫고 성실히 학교 수업을 따라가야 할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엄중히 받아들였다. 뒤늦게라도 제정신을 차린 우물 안의 올챙이는 학교에서 주어지는 소논문이나 에세이 과제마저도 따라가기 벅차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읽고 쓰는 실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평범한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심지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마저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의심할 여지가 항상 있으며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고 느꼈다. 공신력 있고 권위 있는 매체나 인물이 하는 이야기도 모두 믿기보다는 철저한 논증이 필요함을 배웠다. 근거자료와 이미 존재하는 연구결과들부터 확인하지 않고 접근하는 태도는 무엇인가를 서술하려는 사람의 태도로 올바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결론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큰 산을 만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제목 선정, 첫 문장의 완성도, 앞뒤 문장의 연결성에 대해 지적받고, 질문받고, 다시 준비해야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서 적었는지에 대해 근거가 없을 때는 발표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질문에 균형 있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서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평소에 가지고 있던 통설을 가져올 수 없었고 충분한 근거들이 항상 필요했다. 특히나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룰 때야 말로 그 개념을 지칭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읽고 와야 했다. 그렇게 에세이 한 편, 발제문 한 편씩을 늘려갈 때마다 점점 추론 만을 나열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수 있었다. 이미 큰 합의가 정리된 용어의 개념을 이해한 후에 차용하고, 관점과 입장에 따라서 어떻게 의견이 갈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을 하고 접근하는 태도를 배웠다. 하나의 이슈나 개념이 처음 생겨서 구성될 때는 어떤 반응이나 의견이 존재했었고 어떤 양상으로 흘러서 지금은 몇 가지의 중론이 있는지에 대해서 메타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수고스럽고 까다롭게 진행돼야 했던 이유는 연구결과들에 대한 인정을 하고 이미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세워진 논리를 가져와서 의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설득을 위해 필요한 힘을 갖추기 위한 준비였다. 그토록 받아치기 힘든 질문들을 받으며 글과 말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했던 시간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기본 요건을 훈련하는 셈이었다. 설득력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쉽게 반박당하지 않고 핵심을 전달할 수 있는 시작 기준점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린지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반박에 대해 기본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 설득력을 통해서 결국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혼재된 지식과 정보를 연결 짓고 꿰매어서 결국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만들 수 있다면 인문학을 배우고 공부한 의미가 남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이라고 일컫는 진실 역시 태초에 창조와 함께 스스로 존재한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 또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무엇이다. 거칠게 비유해서 요즘은 그 무엇을 쉽게 콘텐츠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학교 1학년 논술 수업, 고등학교 시험지에 남긴 문제적 편지, 대학에서 훈련한 설득력 갖추기를 지나서 나라는 사람을 통해 생산될 콘텐츠의 향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문제의식은 본질이라는 개념을 원동력으로 삼았다. 본질에 다가서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당시에 가능한 수단이었던 수업들과 훈련을 겪었다. 어딘가에서 설득력을 갖춘 나의 콘텐츠가 읽히는 것을 기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통념에 대해 질문하고 당연한 것들에 대해 궁금증을 지닌다. 질문을 통해 진실을 가린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