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사회적 역할, 가족 내 위치를 제외하고, 스스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대학 논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강사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누구누구의 아들딸들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MBTI, 주말에 다녀온 곳, 최근에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 보유한 주식자산,
이렇게 물어보면 개개인의 정체성을 쉽게 규정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삶에는 취향이나 성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늘 존재해왔고, 사라지지 않았다.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른다는 함정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반응이다.
사회에서 요구하고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반응,
불황의 시대에 시도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부지런한 대응,
손쉽게 소비되는 자극에 대한 변화 작용을 능숙하게 대처하는 자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워지는 우대권을 건네받는다.
무엇을 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것과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고,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뜻을 헤아리면서 지내고 있는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 먹었기 때문에,
어딘가를 졸업했기 때문에,
새로운 집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내 정체성이 엮어지고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착각 행위다.
다시 묻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인 건지.
내가 유튜브를 얼마큼 시청했는지가 그 일에 영향을 끼쳤는지,
SNS로 주고받은 메신저의 다양성과 총량이 그 일과 관련이 있는지,
계좌에 남아있는 금액으로 소비한 상품들이 그 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온라인 숙제들이 끝났다면, 비로소 숨겨진 맥락을 다시 살펴보려고 할 것이다.
나는 과거에 어떤 뜻을 품었는지에 대하여.
그 뜻이 내게 왜 중요한지에 대하여.
왜 그 뜻이 내 안에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하여.
세상에 내가 가진 뜻을 무엇으로서 드러내고자 하는지에 대하여.
이것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대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문학적 통찰이다.
인문학적 통찰은 소비로 구매할 수 없는 종류에 속한다.
밭을 갈듯이 시간과 힘을 들여서 행하는 생산 활동인 것이다.
구조 자체에서 소비로 접근했을 때 가치가 떨어져 보이는 것은 등가 교환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치가 낮으면 투자하지 않고, 방치돼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꽤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거나, 맥락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늘 그랬듯이 반응해버릴 것이다.
'아, 노잼이네.'
'아, 이거 진짜 맛있네.'
'아, 피곤하네.'
운이 좋게도 사람에게는 반응할 수 있는 기능 외에도
여러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고
시간의 흐름을 느껴서
연결망을 구현해내는 능력이 있다.
적어도 스스로 직조한 그물을 바다에 던지고, 어떤 것을 건져낼 것인지
정리가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일을 하는 것,
일을 그만두는 것,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
아침에 일어나는 것,
밤에 눈을 감는 것,
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은
반응들의 관성으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새기고 남기고 풀이하고 헤아리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은 반응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한 번쯤은 브레이크가 필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