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우하우스>와 책 <바우하우스>로 새로움에 대한 정의 다시 하기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의 흐름이 바뀌는 역사적 시간들이 있다.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지겹더라도 그 과정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해당 단어가 진부해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전 세계와 온 인류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 중이고 매년 업데이트되는 시간과 공간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주로 이러한 정보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이해하고 적응해서 선취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용도로 팔린다. 황금이 숨겨져 있던 땅을 먼저 발견한 자가 가져갈 수 있었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목표지향적인 욕망은 관련 시장에서 수입을 얻게 만들어준다. 그 안에서 주변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같이 살아갈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고 생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밀려난다. 국가나 제도적 차원 또는 공공 시스템이 뒷받침해주면 다행이겠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시스템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100년, 기술과 산업의 혁명이 일어났던 때에 자발적으로 자생하기 위한 사람들의 분투기로 기억된다.
사회와 시대는 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예술과 실험이 왜 필요한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바우하우스다. 지금의 디자인, 예술, 건축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를 구축한 멀지 않은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예술과 기술이 통합된 기능적인 형태의 뿌리가 된 곳이다. 아파트 건축이나 대도시의 고층건물들이 참고한 국제주의 양식 건축 역시 바우하우스 건축에서 참고한 경우가 많았다. 가구점이나 마트에서 판매하는 일상용품의 대량생산도 바우하우스를 거친 아이디어 중 하나였다. 바우하우스에서 실시한 1학년 기초교육 커리큘럼은 현재도 대부분의 디자인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으로 채택되고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1919년, 혼란의 시기로부터 14년밖에 유지되지 않은 학교의 우렁찬 움직임은 후대에 강력한 바람을 일으킨 셈이다.
바우하우스가 이러한 명성을 얻게 되는 데 기여한 신화적인 요소들이 있다. 당시에는 계급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던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새로 개척했다는 데 있다. 또 다양한 지역 출신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겨난 어마어마한 통합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교육하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칸딘스키'와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이 포함돼있었다. 이전까지 아카데믹하지만 실용적이지 못했던 예술교육에서 탈피하여 그 과정 자체가 창의적이고 영감을 주는 교육 커리큘럼도 한몫을 한다. 이러한 특징들을 나열하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토피아라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바우하우스가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다는 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지금 현재가 아닌 당대에도 이름세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유일하거나 최초의 디자인 교육기관이라는 지위는 맞지 않다. 유럽에 AA 스쿨, 브후테마스, 브레슬라우 예술학교 등이 존재했었다. 또 디자인 자체를 오래 가르치고 발전시킨 나라는 독일이 아닌 영국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바우하우스가 탄생하기 전 1890년대부터 디자인과 공예의 통합을 실시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독특한 기초교육 과정 역시 영국의 미술공예 운동과 당시의 이론가와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점도 언급되고 있다. 색체, 형태, 음을 종합하는 공감적 능력과 조화시키는 능력을 배양하는 시간은 특별해 보이지만 유일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우하우스가 오늘날 많이 불리고 기억되는 건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우하우스 출신 교수와 학생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그 의식을 전쟁 후 미국에 널리 알리는 일을 했다.
그렇다면 유능한 교수와 학생들을 구성하는 공동체는 과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열정을 가지게 만든 건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였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설립되었고 그 이전부터 비슷한 의식을 가진 이들은 1918년부터 이미 유사한 조직과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8년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심각한 피해와 후유증만 남긴 체 눌러앉은 해였다. 패배감과 가난한 일상은 민중들 사이에 불안과 분노를 자아냈다. 어떻게 해서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모든 분야에서 일관돠게 드러났다. 예술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문화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건 바꾸자는 태도는 강하게 결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바우하우스의 초기 설립원들이 모여서 뜻을 함께 했다. 나중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는 건축가 그로피우스, 교수에 합류하는 칸딘스키, 클레 등이 있었다.
지금이야 독일은 세계적인 경제와 산업을 자랑하지만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주변 나라들에 비해 조급한 처지였다. 연방 국가 형태의 통일도 한 발 늦었고 식민지 확보에도 다른 유럽 열강들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었다. 가지고 있는 영토에서 천연자원이 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 주도로 공업 생산을 일으키는 방법이 거의 유일한 발전 계획이었다. 자국의 수출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제품의 품질이 좋아야 했다. 이 점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고민이었다. 새로운 기계 생산기술과 수공예 생산품 간의 격차와 괴리는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이때 독일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새로운 기계와 산업 재료를 활용하고 새로운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을 요구했다. 과학기술도 대폭 수용하고 공업 생산을 인간의 삶과 연계할 수 있는 캠페인도 펼쳐졌다.
바우하우스는 시대적 요구와 예술가들의 모임과 목소리 사이에서 설립되었다. 바우Bau는 건축을 뜻하고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한다. 의미만 보자면 건축을 가르치는 학교로 느껴지지 만 건축을 실제로 가르친 햇수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실제로는 건축을 위한 학교라기보다 교수와 장인과 학생들을 하나의 사회적 공동체로 짓는다는 뜻에 가까웠다. 단순히 이념적으로 묶이는 것을 넘어서 전쟁 이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으로 세운 점도 작용했다. 디자인과 산업을 연계하는 중세 길드 형태로 재정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척박해진 독일 땅과 거주민과 공업 경제에 참여하고 사회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목표였다. 나머지 화려한 예술 수업이나 실험적 분위기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보면 수단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난 지금 멀리서 지켜보면 완성된 형태의 건축물과 잔존한 결과물로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우하우스는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전쟁이 항상 우선시 되었던 상황 속에 재료나 도구들은 징발되기도 했다. 시설과 교육 환경도 열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적 철학도 체계적인 관리로 엘리트들의 우아한 합의를 거쳐 통과된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갈등과 잡음이 많았다.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예술성을 중시했다가 기술과 외주를 더 치중하거나 하는 변화가 늘 있었다. 독일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는 독일을 점령한 집권당인 나치가 거부하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감시당했다. 결국 초대 교장인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의 건축학과, 또 다른 교육자가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등으로 망명하고 진출함으로 그 의식이 전파될 수 있었다.
바우하우스 의식의 핵심은 지금은 당연해진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에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다. 먼저 새로운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움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학생들은 기존에 여겨지던 예술에 대한 인식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여러 분야에서 발견되는 공통성을 발견하고 균형과 일치를 찾아내는 철학이 있었다. 어떤 직업이나 전문가가 있더라도 두려움을 갖기보다는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서 함께 이룰 수 있는 징조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에도 예술적 견해를 삽입할 수 있었고, 실내디자인에도 건축적 요소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고민하기보다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중요시한 점이다. 새로운 기술이 생기고 정착될 때에는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님이나 교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 배워야 할 곳을 찾아가서 즐겁게 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3가지를 사람과 사회를 향해 쓰고 활용하는 것이다. 집을 짓고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쓰이고 더 나아지는 데 기여하는지 고민할 시간을 먼저 가진다.
사회와 시대는 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과학과 인간의 교육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인간은 몰랐던 영역을 발견하며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다. 현대 사회는 국가를 넘어서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을 앞당기기도 하고 속도를 내기도 한다. 정신없이 바뀌고 뒤집히는 현실에서는 초조해질 수 있다.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 급해 보일 수도 있다. 빠르게 일을 수행하고 급한 불을 끄다보면 진짜 문제들은 계속해서 방치되고 오히려 더 불어나 커지기도 한다. 바우하우스가 1919년부터 20년도 채우지 못하고 폐쇄당한 건 아마도 급한 불을 끄고 싶어 했던 국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치는 1945년 패배를 선언했고 바우하우스 정신은 100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새로움에 당면한 때에 당장에 결과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무모한 움직임들이 있다. 그중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신과 행동은 기록하지 않아도 시간이 그들을 성공적인 역사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