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예술가론 <초상들>에 담긴 시선 해석하기
예술과 관련된 시선에는 4가지가 있다. 관람자의 시선, 화가의 시선, 작품 속 인물의 시선, 그리고 이 모든 장면 전체를 서술하는 시선이다. 4가지의 시선은 죽음을 경계로 얽히고설킨다. 살아있는 관람자가, 죽어있는 화가의 작품을, 살아있는 작품 속 인물로, 죽어있는 서술자의 시선으로 읽기 때문이다. 시선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눈앞에 놓임이라는 조건에 종속된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각자와 전체의 머리 안에 무엇인가를 그리며 살아간다. 예술에 대한 글쓰기는 시선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중에서도 '존 버거'의 글이 남다른 이유는 애써 보이는 것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상이라는 것에 먼저 접근하기 위해서 왜 귀, 눈, 코, 입이 있는 면을 묘사하는지 질문을 시작한다. 얼굴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 목격을 담는 눈, 믿음을 전달하는 입, 생기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 초상들은 곧 당시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남기는 표현이다. 한 번 남겨진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된다. 마치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가장 밀접하게 나타나는 얼굴은 지금의 시선을 닮아 있다.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동일한 뉘앙스라면, 남겨진 그림의 작가가 품었던 모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초상 너머 배경이나 풍경과 함께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 보인다. 원근법을 사용한 실제와 비슷해 보이는 구도가 아니더라도 장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어렴풋이 해석 가능하다. 몇 백 년 동안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간직되는 건 현실을 반영한 강한 믿음들이다. 세상은 절망적이라거나 희망적이라거나 인간은 다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생과 사의 경계가 담긴다. 한 번 바라보는 데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는 행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논리적이지 않고 사실적이지 않은 감각들이 오히려 더 현실과 닮아 보인다. 실제를 반영한 시선이라는 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를 하면서도, 눈에 비친 화면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짜의 시선을 끊임없이 만드는 사람은 과거에 화가라고 불렸다. 그들은 스스로의 얼굴도 직접 만들고 보여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알고 지내거나 모르는 사람들도 그 얼굴을 알리는 행위에 가담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스스로도 죽어있는 인물의 초상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 뒤에도 찾아올 시선을 반길 준비를 마친다. 그림과 그리는 행위의 힘이 합쳐지면 화가가 경험한 외부 세상을 얼굴에 모을 수 있게 된다. 모아진 의미들은 표정이라는 매체로 내용을 채운다. 팔, 다리, 몸통, 손, 발, 목, 머리의 위치와 구도는 관계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세상은 이미 특정된 관계들로 가득하고, 그 연결고리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누군가가 그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도록 인간이 선호한다. 새로운 관계를 보고 싶은 화가들은 해체와 제거를 사용한다. 인간이 선호하는 방식에 거리를 두고 태아 시절처럼 아무것도 없었던 상태에서 출발한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사회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가 짓는 표정과 몸동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용서와 믿음이 선택된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에 시선을 두고, 세상을 닮아가려 애를 쓰며 자라 난다. 어른들의 행위는 더 이상 용서와 믿음을 유도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두 바라보지 않는다. 쳐다보지 않음은 다양한 이야기의 씨앗이 되는 행위 모음을 만든다. 이 장면을 주목하게 만드는 자연 현상은 빛이다. 인물과 빛이 만나면 없었던 강조 효과가 만들어진다. 빛을 조절한다는 것은 인물을 어떻게 보게 만들 것인가를 넘어서 어떤 인물을 말할 것인가를 뜻한다.
가까운 곳을 보고 있는 인간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차이는 빛이 닿지 않는 믿음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 먼 곳을 바라볼 때 현실과 동 떨어진 상을 찾고 있다면 가까운 곳에 관심이 없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무엇이 되었든 눈앞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두렵거나 부담이 되는 인간은 먼 곳에 시선을 둔다. 역사와 전설이 된 농촌의 작품들은 도시에서 먼 곳을 바라보던 인물들을 따라 간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인간의 초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경험은 보는 사람의 위치와 맥락이 구성하게끔 세상이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과 화가들의 위치에 대한 선택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유다.
현실을 재현하고자 애쓴 화가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였다면, 그리는 행위는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로 말할 수 있는 시선이라는 것의 의미를 한 층 더 발전시키고 시선이 도달할 수 있는 본다는 것의 최전선에 머무르고 나아가는 것을 숙명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도저히 그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모두에게 익숙한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다.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관람자의 시선이 고흐의 작품에 머무는 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되고자 하는 작품이나 화가였다면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 시대, 그 직업, 그 사회가 부여한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시선 속 사물이나 인물과 나눈 진심의 대화가 모든 것을 뒤엎는다. 존 버거는 이를 '사랑'이라고 적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본다는 것의 최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후로 그 뒤의 초상들은 이데올로기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큰 전쟁을 끝낸 이후 평화가 연출되는 것처럼 시선을 둘러싼 의문과 궁금증은 각종 이론들과 손을 맞잡았다. 함께 두 팔을 올리며 더 이상의 괴로운 싸움은 모두 끝이 난 것처럼 화가와 예술가들은 각 개인이 되었다. 개인이 표현하고 싶은 감정, 개인이 연구하고 싶은 시선, 개인이 만들고 싶은 작품에 몰두했다. 시선에 대한 역사는 더 나아가고자 하는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파티가 되었다. 파티에 초대된 건 계보에 속할 법한 인물뿐 아니라 참여 가능한 모두였다.
시선을 갖고 있는 누구나 참석한 평등한 파티는 확실한 관심을 한 곳에 모으고 끝나지 않는 화려한 모습을 제공한다. 영감을 받은 이들은 예술가를 제외한 모두였다. 이들에게 또 다른 빈센트 반 고흐는 위협의 대상이며 파티를 망치는 주범이 된다. 관람자의 시선, 화가의 시선, 작품 속 인물의 시선, 그리고 이 모든 장면 자체를 서술하는 시선은 모두 파티의 주최자가 돈을 주고 구매했다.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관람법은 파티장 내에서 만 통용 가능하다. 그 외의 시선은 혐오를 받는다. 파티 바깥에서 외치거나 힘을 모았던 시선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협상을 맺어 파티의 초대장 외주 제작을 맡게 되었다.
존 버거는 각종 이데올로기 파티들과 예술로 만들어진 파티 초대장이 왕성하게 벌어지는 시대의 시선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의 초상은 예술가들이 적어도 그리거나 만드는 행위에 있어서 자연스러웠다는 점을 믿으려 한 시선을 담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시선을 믿거나 화려해 보이는 파티를 묘사하는 행위와 양보할 수 없는 구분선을 그은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치른 엄하고 모진 싸움의 결과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바라보지 않는 상상을 품은 것이다. 아직 인간성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볼 수 있고, 바라봄을 예술을 통해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글쓰기다. 존 버거가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초상은 아무것도 없음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과 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