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철학과 안잔 채티지의 신경미학과의 조화
즐거움은 보상과 관련이 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고, 점심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을 때 적절한 돈을 소유하면 즐겁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좋아하는 것, 즐거운 것, 원하는 것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보상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자연스럽게 이를 쫓는다. 싫어하는 것, 혐오하는 것, 불행한 것이 인생을 가득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사회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문제가 늘 발생하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이나 가정의 평화 만을 지켜주는 시스템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각자의 이기심에 짓눌려서 행복한 각자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거대한 거래를 통해 부를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면서도, 주변에서 쉽게 관찰한 조화로운 일상을 고안하며 <도덕감정론>을 썼다.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핵심적인 통찰은 개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신과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유혹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표현한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는 인정, 칭찬, 존중, 존경, 관심의 표현 등이 전반적으로 포함된다. 그의 시대에서는 고결함, 정직함 등을 통해 명예와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김 받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감정이 될 수도 행동이 될 수도 있는 사랑은 가장 진실하고 솔직하기에 거짓으로 하기는 어려운 영역이다. 실제로 사랑이 없는데 사랑하는 대상에게 치르는 시간과 돈과 마음을 줄 때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사랑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의 목록에 고결하고 정직한 사람만 있지 않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아무나 쉽게 따라 하지 못하는 능력을 통해 얻은 재물을 가진 소유자, 또는 유명함을 통해 경외심을 거느리는 자들 역시 사랑받기 유리한 조건이었다. 일반적인 능력과 재능을 벗어나 뛰어난 인간이라는 인정을 받는 순간 명성을 얻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의 시대까지 만 하더라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인물은 전쟁 영웅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었다. 미디어의 발달로 스포츠 선수, 영화배우, 위대한 예술가들도 이러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 2010년대 정보 기술의 변화는 뛰어난 신체능력이 없더라도 특정 기술을 연마한 이들 역시 다수에게 사랑받고 숭배받는 유명인이 되었다.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그 뒤부터는 사실로 인정받는다. 사람이라면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요'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원하는 무대 위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행위는 비즈니스가 되고 산업이 되었다. 바로 이 매료되는 순간과 사랑을 주고받는 거래들에 대해 애덤 스미스의 후손들이 성실하게 연구하고 이론으로 만들었다. 무엇인가에 빠지고 심해지면 중독이 되기까지 하는 과정은 즐거움과 보상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꼭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보수를 주는 일, 지금보다 더 최신의 전자기기, 더 큰 한 방을 가져다주는 계약은 모두 같은 흐름에서 읽을 수 있는 보상심리다.
관심과 돈이 주는 보상 작용은 같지 않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를 추구하게 만드는 원인은 유사하다. 심각한 비밀은 아니고 간단한 사실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후져 보이면 된다. 더 나아가서 없다고 느끼면 아예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다방면으로 알아보지 않고 간편한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도록 만드는 보상 게임은 의사결정이 합리적인 것처럼 만들지만, 실제로는 숨겨둔 버튼을 목표 지향적으로 누르게끔 유도하는 트릭이다. 어렵게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여 얻어낸 결과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나 이는 승리를 향한 열정일 뿐 전체 판에서 이성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스마트한 방식으로 '지금보다 조금 더' 돈을 소유하건, 고생과 굴욕을 버티고 유명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건, 진정한 사랑과는 큰 연관이 없다고 말한다. 아주 짜릿한 순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일상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더 많은 사랑, 관심, 소유를 찾아 나서는 행동은 멈추지 않는 쳇바퀴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 멈추지 않으면 쳇바퀴는 돌아가지 않는다. 쳇바퀴에 있는 동안에는 장기적으로 판단하기보다 눈앞에 놓인 먹잇감 만을 쳐다보며 단기적인 보상에 매몰된다. 이쯤에서 애덤 스미스 나리에게 질문이 하나 생긴다. 애덤 스미스가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똑같은 욕망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때는 경쟁 방식의 제로섬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스마트하게 돈 벌기, 특정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는 유명한 사람 되기의 과정에서 보상을 위해 달려가는 의지만 있다면 좋은 친구, 배우자, 동료가 되는 법은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서 잔혹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 논제로섬 게임 동산을 꿈꾸는 건 아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되, 신뢰와 친절과 존중하는 문화 정도는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의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놓여있고 선한 의지가 있는 행동은 말로는 쉬우나 현실에서 와닿게 만들기는 어렵다. 이것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좋은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만큼 복잡하다. 좋은 예술작품 역시 단기적인 감각 자극을 넘어 말로 표현하기에는 간단한 수사로 부족한 총제적 여정이 필요하다.
예술 역시 자극과 보상에서 출발한다. 좋은 작품을 보면 즐겁고 해당 경험을 더 자주 가지기를 원할 수 있다. 선호하는 사람의 얼굴, 마음속에 품고 다닐 만한 자연 풍경, 매력적인 인공 디자인에서 즐거움이 나타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특이한 점은 시대와 지역과 사회마다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즐겁다고 여길 수 있는 시각적 자극이 있는가 하면, 특정 문화에서 만 열광하는 예술이 존재한다. 특정 짓는 문화적 배경과 요인은 어디에서 매력을 느낄 것인지를 결정하는 맥락이다. 좋은 느낌을 주는 쾌감, 온도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정서, 정보를 통해 기억과 결합되는 의미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논리적이지 않은 현상을 '우연'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예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직도 좋은 예술의 조건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려 하지는 않는다. 즐거움 만을 내어주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공포를 주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는 예술도 있다. 관습적 행위들에 대한 집대성으로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예술이 있는 동시에 오랫동안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에게 만 말을 거는 예술이 있다. 좋은 작품이라는 명성 역시 특정 시간과 공간에 따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모든 대중에게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그 정서와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받는다. 애덤 스미스가 파악한 통찰에서도 상황과 맥락에서 적절한 행동을 치르는 것이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말한다. 좋은 작품이나 좋은 행동을 하려는 사람이나 주변에 놓인 관계에서 얻는 신뢰가 중요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예측한 것 이상으로 현대 국가 시스템과 세계 경제는 그가 관심을 기울인 아이디어와 관련이 많다. 지금 펼쳐져 있는 맥락에서는 그가 말한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유효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와 역사 속 맥락 안에서 적절하게 타인들과 신뢰를 맺는다는 건 복잡하고 단순한 즐거움보다 풍부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 법으로 지정하지도 않고 투표를 통해 합의되지도 않는 문화적 요인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연'속에서 흔들렸다가 부서졌다가 결국 사람 사이의 믿음으로 굳어진다. 믿기 힘든 복잡한 세상에서 마음 편히 누르는 즐거운 보상 버튼은 스스로와 주변 관계에서 신뢰와 사랑을 잃게 만들 수 있다.
관계와 맥락 안에서 스스로를 극진히 생각하는 방법은 자신만을 위하여 누르는 버튼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버튼을 눌렀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한 번은 다시 생각해보고 마음 바깥의 관계들과 어떤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지켜볼 수 있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장기적인 즐거움을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신의를 바탕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이들과는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즐거움 만을 아끼고 그것을 지켜내려 애쓰다가는 남의 소중한 작품 같은 일상들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좋은 예술 작품 역시 자신의 뛰어남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우연히 맥락에서 발견되는 즐거움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