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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in Oct 07. 2023

한국인의 첫 번째 집

Nomad Art Project <수정과 유지 사이-borderland>

인간은 출발 지점이 사라지면 발 딛고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 모든 관계의 기준이 되는 중심, 즉 집이 필요하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한국은 고향이자 집터다. 한국인 집단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한 공간은 문화와 전통으로 채워진다. 지난 100년 동안에는 일제 식민지, 급격한 개발주의가 단절을 이끌었다. 아늑했던 골목, 정겨웠던 주거지는 집단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삶의 토대가 되는 지평이 없으면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낯선 공간을 맴돌아야 한다. 스스로부터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안정된 기반에서 향유할 수 있는 일상이 아니라 불안한 충격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실감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들을 함께 기억하고 애도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익숙한 고향 같은 지평을 지키기 위함이다.


고향의 상실은 비단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집, 삶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을 이야기할 공간이 부재한 사회와 집단은 죽음의 트라우마에 짓눌린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1950년대, 1960년대에 이촌향도로 서울에 몰려든 사람들은 땅값 상승, 부동산 투자를 경험했다. 197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산층에게 부동산은 교환가치가 있는 자산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빠르게 사고팔 수 있어 가격 상승의 폭이 훨씬 더 큰 기회, 유리한 고지였다. 


살아가는 공간, 장소, 위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이윤추구로 좁혀지면서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양식은 달라졌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철학보다 부동산 가치의 설렘이 앞섰다. 이 시대 국가, 사회, 개인은 겉으로는 증식된 자산으로 외식을 꾸미고 연출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 정체성은 모호해지는 정서를 경험했다. 


개발을 제일의 우선순위로 삼았던 한국현대사에는 후순위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이 존재했음 자체를 부정한다면 현재와 미래에도 새로운 상상은 지연될 것이다. 성장 자체가 방향인 지금의 한국 경제인구들은 고소득이 주인인 세계관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취업, 결혼, 출생, 육아, 교육은 고소득의 서사에 맞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세상인 것이다.

 


한국에서 유목하며 문화예술에 새로운 대안을 시도하는 독립된 단체 Nomad Art Project(NAP)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도시발달과 인구밀집으로 쉽게 소멸하는 ‘고향’에 관심을 둔다. 곳곳에 깃든, 현실적인 작은 이야기와 연합하고 대변하는 움직임이다. 거주했던 이들이 떠난 자리에 특정 기간만 머물며 예술적 결과물을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행위 자체가 NAP의 목적이다. 


기획하는 동안 겪은 체험은 작품의 재료로, 지역이 축적한 의식과 정서는 프로젝트의 주제로 삼아, 관객이 주도할 수 있는 융복합프로젝트를 마련한다. 언젠가 변할 것에 집착하지 않고 계속될 이야기의 전개를 고대하며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또 다른 지역을 찾아 방랑하는 성격을 취하고 있다. 2021년 대림동에서 <thermal>을 전시하고 2019년 황학동에서 <LAB2065>을 전시했다. 3번째 프로젝트인 <수정과 유지 사이–borderland>는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컴바인웍스 갤러리에서 선보였다.


계동은 북촌한옥마을로 알려진 지역이다. 북촌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중심 거주지였다. 조선시대 왕의 거처인 궁과 가까웠기 때문에 개화기까지는 왕실의 친척, 인척, 관료층이 살기도 했다. 오늘날 북촌에 남아 있는 도시한옥은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에 건설되었다. 지금 북촌의 한옥 외부는 담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편하게 살 수 있는 구조로 바뀌는 추세다. 1983년에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에 보존지구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대 후반기에 빌라 건축 사업이 시작되면서 중앙고등학교에서 창덕궁으로 가는 고개에 있던 한옥은 빌라 건축물로 대체되었다. 이후 한옥마을 자체가 이색적인 공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투자 대상으로 바뀌기도 했다.


NAP는 2023년 북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귀를 기울였다. 거주민들을 만나 궁금한 점을 묻고, 방문객들을 관찰했다. 그중에서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한옥과 고층 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골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옥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와 옛것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의 시선이 해석의 대상이었다. 


시점은 인간이 속한 공간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표현이다. 특정한 지점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는 머무르는 것으로 드러난다. 한때는 왕과 거리적으로 가까운 주거지였던 곳이 개조된 주택이 되고 관광지로 변해가는 흐름 속에서 특정한 역사적 맥락이 담겼다. 2023년에 포토스팟이었던 배경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또 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NAP는 맥락화된 북촌을 연구하고 경험적인 부분을 찾아내 새로운 공간 기획을 상상한다. 개발사업, 정책, 마케팅 관념에서 벗어나 다르게 생산할 수 있는 방식을 도출하고자 한다.



북촌은 수도 서울에서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집터다. 과거로부터 멀리 떠나온 한국인이 다시 북촌 같은 군락을 짓는 상상은 하지 않겠으나 북촌한옥마을만큼은 여전히 늘 주목의 대상이다. 급속도로 다층화되고 고층화를 이루며 대형화된 한국의 주택은 역설적으로 오래된 한옥을 특별하게 만든다. 서서히 자라난, 공동 문화로 지어진, 오래된 기억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동네는 낯설면서 익숙할 것이다. 내면에 안정을 찾기 위한 시도로 고향 같은 북촌을 찾는 마음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처럼 연결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떠남과 돌아옴의 과정은 깨어남과 잠듦이라는 행위와 닮아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후퇴와 구별된다. 후퇴를 위해 물러나면서 뒷걸음을 칠 때는 시선이 정면을 향해 있을 것이다. 반면 집을 향해 돌아가려면 몸을 돌려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앞과 뒤는 반대로 바뀐다. 이미 지나간 과거인 줄 알았던 시공간은 현재에도 머무르며 의미 있는 가능성을 준다. 이러한 역재생을 통해 발굴된 기억들은 새로운 상상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북촌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요절하지 않은 집을 낯설게 바라보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회상보다 현재적 성격이 더 강하다. 지나갔다고 생각한 과거의 사건이 현재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머무르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게 인식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북촌 같은 공간은 곧바로 시적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 보이는 한옥이 눈에 띄는 반면, 명을 다한 아파트, 건축폐기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가슴에 상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목소리를 듣고자 애도하거나 추모 행위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롭게 상상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집이 아파트 외에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과거와 연결된 상태에서 재정립을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NAP는 관람객이 작품을 보듯 바라보는 북촌의 골목처럼, 허구적이라고 믿는 가상의 공간을 의도하기 위해 초록색 크로마키 천으로 벽을 코팅했다. 크로마키는 배경에 다른 화면을 삽입하는 기술이다. 초록색 배경에 보여주고자 하는 화면을 합성하면 두 가지 그림이 동시에 합쳐 보이는 효과를 낸다. 배경 화면이 어디라도 될 수 있다는 기술을 통해 관객이 NAP가 탐구한 서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디지털 패널을 통해 재생할 영상은 가상이기는 하지만, 전시공간은 특정한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과 일상이 겹쳐져 있는 관객들은 크로마키가 나타내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여기서 NAP는 문화예술을 통해 디지털과 미디어 기술에서 억제된 가능성과 결합한다. 정보통신기술이 생활환경이 된 현대인의 생각에서 아직 퇴색되지 않은 집과 고향에 대한 기억을 미디어에 싣는 것이다. 


<초석과 촛불만 한 크기의 흔들림>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 패널은 ‘초석과 촛불만 한 크기의 흔들림’이라는 10분 분량 다큐멘터리 영상을 재생한다. 서울의 생활폐기물, 건축폐기물이 그 쓸모를 다하면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되는지를 기록했다. 작다 못해 버려지는 이야기에 속하는 폐기물의 생애는 출처와 결말이 알려져 있지 않다. 거주자의 몸을 담았던 건축물의 재료인 콘크리트, 금속, 타일 등은 매립과 소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기억과 증언을 수행하는 형식이 특징인 다큐멘터리를 통해 평범한 폐기물을 화자로 조명하는 효과를 얻는다. 실제 누군가 살았을 집의 장례를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양쪽을 모두 바라보는 일종의 장례 절차다. 주체로서 고려해보지 않았던 폐기물이 겪는 죽음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다. 이로써 관람자는 폐기물과 다시 관계를 맺으며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사람, 건물, 도시가 딛고 있는 땅 위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위다. 



일어서서 감상할 수 있는 두 개의 디지털 패널에는 일상에서 수거된 폐기물이 1차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하나는 순재생으로, 또 다른 하나는 역재생으로 보여준다. 모니터 화면이 흐르는 영상을 송출하고 있는 한편, 폐기물이 아직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모습이 찍힌 북촌의 한 공터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초록색 천으로 가려진 한쪽 벽면에 난 칼집 틈으로는 갤러리 건물 밖, 북촌의 지금이 보인다.

 

사진과 영상 미디어는 북촌의 현실을 확장시킨다. 촬영 당시의 상황과 관람객의 개인적인 경험이 중첩된다. 작품 속 폐기물과 실제 한옥은 연결된 개념으로 나아간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폐기물이 죽어가는 과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축물의 부재를 암시한다. 일시정지된 사진, 재생되는 영상,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깥 풍경은 관람자의 시간관을 실험한다.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전시장 바깥 북촌 거주민들이 생활하는 한옥이지만 건축물의 과거이자 미래일지 모르는 폐기 과정은 시간이 일방향으로 흐른다는 역사관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사진 카메라 렌즈 앞에 찍힌 것이 어느 곳에는 살아 있고, 영상 안에 있는 폐기물은 죽음과 생을 오고 가고 와중에 관람객이 추구할 균형은 흔들린다. 혼란을 안정으로 되찾으려 할 때 크로마키 기술을 통해 입혀진 관람객의 몸이 재생되고 있는 디지털 패널 화면 안에 나타난다. 


공간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고향은 인간의 공동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수정과 유지 사이 – borderland>는 앞과 뒤, 떠남과 돌아옴, 재생과 역재생은 시공간이 고정되지 않고 사람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상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작은 역사 이야기는 과거에 실현 가능성이 있었던 '지나간 미래'를 기억한다. 상상은 개발이 아닌 다른 대안들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에서 새로운 고향과 거주가 가능하려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허구적 이야기와 이미지가 필요하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곳으로 향하려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문화예술을 통해 시선을 옮겨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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