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쓰러지지만 땅은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알카라스의 여름>

by CINEKOON

그냥 농촌을 배경으로한 힐링물인가- 싶었으나 보고나니 변화무쌍해 잔인한 우리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부르짖을 수 있는 건 오직 가족뿐이라 말하는 비관적인데 낙관적이고, 또 낙관적인데 비관적인 영화였다. 포스터만 보고는 그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건가 싶었던 거지.


알카라스라는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온 주인공 가족. 하지만 비범하고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의 풍파 또한 이 작은 시골 마을 알카라스를 굳이 굳이 찾아 오게 된다. 복숭아 과수원을 싸그리 갈아엎고 대신 그 부지에 태양광 발전 패널을 대규모로 설치하겠다 말하는 토지주. 사실 그 토지주가 악덕인 것은 아니다. 그는 주인공 가족을 신사적으로 대하고, 마냥 땅을 빼앗겠다 말하지도 않는다. 현실 경제적인 여건에서 보면 복숭아 농사를 짓는 것보다야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니 그리 하자는 것. 돈도 더 벌 수 있고, 더불어 복숭아 농사 지을 때처럼 힘들지도 않을 거라는 말. 엄밀히 따지면 여러모로 이득인 제안. 그러나 주인공 가족은, 특히 이 모든 농삿일을 지금까지 제손으로 꾸려온 아버지는 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옛날엔 그랬다. 굳이 계약서까지 안 써도, 친한 토지주가 별다른 조건 없이 자신의 친구나 이웃에게 그냥 땅을 임대해주는. 무상이든, 아니면 조금의 댓가를 지불받았든 어쨌든 간에 그 시절엔 굳이 굳이 계약서 쓸 필요성을 못 느꼈었지. 그런데 그 암암리의 호의가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 속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이전 토지주의 사망으로 그 권리 모두를 상속받게 된 아들, 그 아들은 아버지 세대의 무계약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찌되었든 계약서 쓴 적은 없으니 못 빼겠다 깽판 놓지 말고 그냥 조용히 내 말 들으라는 거지. 어떻게 보면 계약을 잘하자는 말을 부드럽게 에둘러 하고 있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최근엔 미리 입력한 몇개의 키워드를 토대로 AI 프로그램이 그림을 그려주는 현실도 도래하지 않았나. 아니, 그려준다기 보다는 생성한다고 해야 맞는 건가?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2004년작 <아이, 로봇> 속 주인공은 최첨단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에게 따진다. "너네가 그리 잘났다 해도 인간처럼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어? 명화를 그려낼 수 있냐고." 그런데 어째 요즘 돌아가는 시국을 보면 그 질문에 대한 기계들의 답은 "되는데요?"일 것만 같다. 첨단 산업화의 기세로 기계가 그림을 그려내고 또 기계가 음식과 음료를 식당에서 서빙하는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편리하고 신기하지만, 한편으로 그 이면에는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된 것 아닐까'하는 생각에 서늘해지기도 한다.


<알카라스의 여름> 또한 같은 문제를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여름내내 땡볕에서 복숭아 나무 가꾸고 관리하는 것보다야 태양광 발전 패널 그냥 설치해두고 냅두는 게 훨씬 더 낫겠지. 그런데 어쨌거나 누군가는 그로써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주인공 가족의 아버지가 과수원을 지키는 데에 고집을 부리며 더 적극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과수원 잃는 것을 할아버지 또한 아쉬워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물어가는 세대다. 또한 아들 또한 과수원에 대한 애착이 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똑같은 농부의 삶을 살게 될까 봐 걱정해 자꾸 그를 밀쳐 낸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맞고, 아들은 이 곳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는 이 복숭아 과수원이 자신의 전부였으리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여기에 매여있었으리라. 가족 모두가 답답해 함에도 아버지가 복숭아 과수원에 유난히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영화는 그 마지막에 모두 다 갈아엎어진 복숭아 과수원,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복숭아 과수원이었던 땅을 비추며 끝난다. 그 이미지는 서글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으로 단단하기도 하다. 그 갈아엎어진 땅의 중심에는 끝내 무너지지 않고 곧게 세워진 주인공 가족네 집이 서 있기 때문이다. 가족. 나무는 쓰러질 테지만 땅은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그 어떤 외부적 상황에도 오히려 단단해지는 가족이란 존재. 영화의 중반부, 세상 모든 걱정을 다 뒤로 미뤄버린채 수영장에서 신나게 노는 주인공네 가족의 모습이 아름다워보였던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movie_image-3.jpg <알카라스의 여름> / 카를라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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