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메뉴>
바야흐로, 셰프의 시대라 할 만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유수의 셰프들이 TV를 통해 안방까지 침투한지도 어언 10여년이 되었다. 그들은 방송에 나와 그들만이 가지고 있던 비법들을 대중에게 공개 했고, 때로는 그들 뒤를 이을 후계자를 대국민 오디션 형식으로 뽑기도 하였으며, 또 그들의 레스토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시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주방 뒷편에만 존재해있던 신비로운 그들의 세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으며, 그들이 요리에 뿌린 마법 속 레시피들까지도 어줍잖게나마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또 그늘도 있는 법. 그렇게 요리와 미식에 대한 저변이 넓혀지자, 이제 대중들은 오히려 그 셰프와 요리들을 무시하게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게 되어서 누구나 무시할 수 있게 된 상황. 요리는 인증 사진 속 미장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셰프들을 별점 따위로 줄세우며 평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조차 어쩔 수 없는 시류의 한 부분이겠지만, 어찌되었든 예전의 마법은 그렇게 점차 사라져만 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이야기는, 비단 요식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타 셰프 슬로윅이 인생을 건 '최고의 코스 요리'라 쓰고 '대망의 복수'라 읽는 최후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경위가 바로 그러하다. 스타 셰프로 등극하기 이전, 초라한 동네 햄버거 가게에서 고객들을 위한 값싼 치즈버거의 패티를 구울 때만 하더라도 그는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행위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 후 그는 점차 그 행복을 잃어갔던 것이다. 왜? 그리고 누구에 의해? 누구겠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지적 허영을 채우고자 허겁지겁 음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왜겠어, 그들이 요리라는 숭고한 행위를 다 망쳐놨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별점으로 평가하고, 자기는 제대로 요리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음식들에 대해 마음대로 지적하고, 또 때로는 그저 돈을 쓰고 싶기 때문이란 이유로 음식을 사서 음미는 커녕 그냥 마구잡이로 뱃속에 집어넣는 행위들. 슬로윅은 그에 분노 했기에, 그런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선보여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는 비단 요식업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 예능 등의 매체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어저께 봤던 영화에 대해 길고 의미있는 토론을 나누기 보단 그저 다섯개의 별점 중 몇점을 줄 것인지 정도로만 고민하잖나. 그리고 그것은 연극도 마찬가지고 책도 마찬가지이며, 하물며 우리가 흔하게 사고 파는 물건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이면에 담긴 의미와 정성을 채 들여다보기도 전에 그저 소비해 버리고야마는 현대의 작태.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고, 또 결국 고객 또는 이용자의 손으로 넘어간 이상 생산자 또는 제공자는 더 이상 관여할 바가 없다-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찌되었든 <더 메뉴>의 메시지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직업, 어떤 작업이든 간에 결국 모든 승부는 디테일에서 나기 마련이다. 고로 고도로 숙달된 숙련자일수록 그 디테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기술적으로 더 뛰어날 수는 있어도, 정작 그 마음에 열정을 지폈던 초심자일 적 마음은 계속 유지해내거나 오랜만에 구현해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슬로윅은 그 기회를 얻었다. '마고'라는 가명을 썼던 한 여자에 의해. 그녀는 슬로윅이 요리를 하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일깨워줬다. 10달러도 안 되는 치즈버거와 감자튀김 세트의 풍미. 그리고 그 뒤에 딸려오는 아련한 추억의 뒷맛. 절대로 슬로윅의 극중 행동과 태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직접 치즈버거의 패티를 굽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그에게 동화될 것만 같아졌다. <위플래쉬>에서 플레쳐가 홀로 재즈바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던 그 장면과 비슷한 감상이었다고 하면 이해라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