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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Mar 11. 2023

이해 가능하지만 위험한 연대

<콜 제인>

유능한 검사인 남편과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듯한 딸을 데리고 짐짓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이.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산모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에 봉착한다. 뱃속의 아이도 소중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대로라면 산모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이에 조이의 담당 의사는 병원 간부들을 설득해 낙태 시술에 대한 허가를 받아보겠다 말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제안은 산모야 죽든 말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진짜 애국 아니겠는가-라는 사고방식으로 단단히 무장된 듯한 남성 중심 병원 간부들에 의해 반려 당한다. 그렇다고 목숨을 담보로 걸 수는 없는 일. 눈 딱 감고 계단 위에서 구를까도 생각했던 조이는 어느 날 우연히 제인에게 전화 하라는 전단지를 보게 된다. 그 전단지 한 장이 그녀 삶 전체를 뒤흔들 거란 것도 모른채. 


<콜 제인>은 1960년대와 70년대 실제 미국에서 암약 했던 여성 중심의 낙태 수술 및 알선 조직을 그려낸다. 낙태와 낙태 조직... 이것이 실화인지 아닌지를 떠나, 어쩌면 당신은 벌써부터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낙태는 논쟁적인 소재이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낙태가 논쟁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맞다 생각한다. 낙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은 매우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낙태 찬성론자들은 산모가 자기 자신의 몸과 그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낙태 반대론자들은 뱃속의 아이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뿐 하나의 인간이고 인격체이기에 그 목숨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말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당신들이 낙태에 대해 찬성 하는지 반대 하는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찬성론자와 반대론자의 이야기 모두 일견 일리 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낙태 문제는 어렵고 헷갈린다. 그리고 이것은 산모와 뱃속의 아이, 최소 두 명의 목숨을 두고 논쟁하는 일이기에 어렵고 헷갈리는 것이 응당 옳아 보인다. 


그러니까 영화가 주 소재로 다루고 있는 '낙태'라는 개념이 매우 논쟁적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 그거 하나만 인정하고 넘어가자. 그렇담 그 다음은? 나는 <콜 제인>이 낙태를 찬성하는 영화든, 또는 반대하는 영화든 상관 없었다. 그저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내가 혼자서는 감히 도달하지 못했을 나와 완전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하게만 만들어줬다면 그 뿐이었다. 영화가 낙태 찬성을 부르짖었든, 아니면 그 반대를 부르짖었든 간에 나는 참고만 조금 할 뿐 그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진 않았을 거라 자신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콜 제인>은 이상한 길을 엇박자로 따라감으로써, 관객들에게 스스로를 오해할 구실을 만들어주고야 만다. 일단, 영화는 조이의 안타까운 상황과 더불어 다른 여성들의 사연 또한 짚어주며 낙태의 어쩔 수 없는 필요성에 대해 관객들을 설득하려 한다. 극중 인물들도 말하지 않나. 어떤 여자는 강간 피해자라 낙태를 해야하고, 또 다른 어떤 여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낙태를 해야하며, 더불어 또다른 어떤 여자는 조이처럼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 낙태를 해야한다고. 설사 당신이 강경한 낙태 반대론자라 해도, 영화 속 이같은 사연들을 들으며 마냥 단호하게만 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로 여기까지는 영화가 낙태의 필요성에 대해 올바른 묘사를 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어느 순간, 조이는 낙태 시술이 생각보다 쉬운 무언가임을 깨닫고 본인이 직접 그를 집도하기에 이른다. 물론 조이가 정식 의사 면허를 딴 건 아닌지라 처음엔 버지니아와 조직의 다른 멤버들도 반대하지. 그러나 상술했듯 낙태 시술을 꼭 필요로 하는 여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버지니아와 다른 멤버들도 그런 여성들을 우선해줄 거라 약속하며 조이의 시술 집도를 허락 해준다. 


헌데 조이의 첫 집도 대상이 누구로 설정되어 있는가. 조이가 낙태를 도와주게 되는 첫 산모는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임신에 목숨이 걸린 여자도 아니다. 유부남과 알면서도 바람을 피우며, 피임을 의도적으로 하지도 않은채 이미 이 조직과 낙태를 경험해본 바 있었던 한 어린 여자가 조이의 첫 집도 대상이 된다. 물론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든, 그녀에게도 자신의 몸과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가 있다. 낙태를 몸의 권리에 대한 하나의 조건으로 본다면 그녀 역시도 낙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영화로써 이러한 <콜 제인>의 선택은 의문만을 남긴다. 낙태를 찬성하는 톤의 영화이면서, 주인공의 첫 낙태 시술 집도 대상이 하필 그녀라고? 그것조차 실제 이야기의 한 요소였든 아니었든 간에, <콜 제인>의 이러한 선택은 관객들이 마냥 따라갈 수만은 없게 만들어버린다. 아, 아니면 첫 집도에서 조이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 일종의 마루타로서 그녀를 선정한 것일까? 그럼 그거대로 또 문제 있는 묘사인데?


이뿐만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은 낙태를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의사 면허도 없는 이가 불법적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이것 역시 조이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조이 이전에 수술을 집도 했던 남자 의사 딘에게도 똑같은 잘못이 있거든, 명백하게. 물론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가끔 이렇게 먼저 선을 넘어주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쿵 저러쿵 따져봐도 주인공으로서 하여튼 법을 어긴 건 맞잖아. 그로인해 남편과 딸에게 충격을 준 건 맞잖아. 그럼 이제 영화의 후반부 관건은, 남편과 딸 사이에서 조이가 어떻게 감성을 추스르느냐 일 것이다. 가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뭉치는지 그리는 게 필요할 거라고. 근데 이 과정에서도, <콜 제인>은 자충수를 남발한다. 


조이의 남편은 성실하고 또 유능하며, 약한 자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검사 쯤으로 묘사된다. 가정에도 충실하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에 갑자기 그 남편과 이웃집에 사는 조이의 친구 사이 불륜 요소를 끼워넣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소가 엄청 과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냥 짧은 단 한 번의 키스. 그마저도 입술을 떼자마자 서로 실수임을 인정하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한 짓이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는 이 작위적이고 설득력 없는 키스를 통해 조이에게도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여성들을 위해서라곤 했지만 하여튼 조이가 불법적인 일을 벌인 건 맞지요? 그로인해 남편과 딸이 상처를 입은 것도 맞지요? 하지만 남편도 알고보니 이웃집 여자와 키스 했네요. 그럼 조이나 그 남편이나 똑같이 사고친 거 맞지요? 그러니까 이쯤 되면 둘이 퉁쳐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뉘앙스. 조이와 딸 사이 관계 봉합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엄마의 진실을 알고선 집밖으로 뛰쳐나가며 싫다 말했던 그 딸이, 단 한 순간만에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오히려 그녀를 응원하는 존재가 된다. 중간에 그 어떤 다른 과정도 없이 말이다. 그냥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을 향해 가고 있으니 부랴부랴 어설프게 봉합한 모양새. 


논쟁적인 소재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정작 그 묘사에 있어서는 어설프게 굴어 오히려 자충수를 만든 영화. 그리고 이해 되면서도 또 동시에 위험하게 느껴지는 극중 인물들의 연대. 대개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과 교훈을 주려 하지만, 때때로 <콜 제인>처럼 한 가지 주장을 하며 목소리를 드높이려는 영화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랬다면, 머리를 더 영리하게 썼어야지. 관객들을 설득하고 또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려면 조금 더 세심하게 굴었어야지. 주제와 소재는 명확하나 필력은 떨어지는 소설 같은 영화. <콜 제인>이 딱 그 짝이다. 


<콜 제인> / 필리스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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