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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ul 10. 2023

야단법석 떨지마

<애스터로이드 시티>


예술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영화 역시 특정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면서도 그를 자신 안에 붙잡아 둔다. 그렇게 보여짐으로써 기억되고 또 추억되는 시공간. 그리고 또 그로 말미암아 아지랑이 마냥 피어오르는 노스텔지아. 생각해보면 웨스 앤더슨은 언제나 그랬다. 그건 어렸던 유년 시절처럼 주관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시공간이 되기도 했고, 가상의 국가가 배경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 분명히 근대 유럽풍에 대한 향수를 폴폴 풍기며 구체적인 시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노스텔지아에 대한 새로운 대답으로,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내놓는다. 


영화는 미소 양국간의 스페이스 러시, 그러니까 우주 경쟁이 본격화 되던 1950년대 중반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와, 우주! 와, 과학!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이제 막 본격적인 출발선에 서있던 그 때의 사람들에게 우주란 무한히 넓은 어떤 개념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열심히 영차영차만 하면 충분히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영역. 그러니까 오만하면서도 낭만적인 무언가가 그 우주 과학 경쟁 시대엔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그럴진대, 정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공간적 배경은 NASA 기지나 백악관이 아니다. 영화가 택한 공간은 그와 반대로 오히려 가장 작고 인적이 드문, 그러면서도 우주에 대한 영향력이라고는 우주먼지만큼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막의 한 마을이다. 


가장 넓은 공간을 지배해보겠다고 달려나가던 시대 속, 적은 인구와 작은 토지 하나도 뭔가 계획대로 돌아가는 게 없던 소규모 마을과 그 안의 사람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거기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또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할 일종의 노스텔지아를 가져와 봉헌해둔다. 뭔가 세상엔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운석이 떨어지고,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며, 이에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관련된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극중 애스터로이드 시티 안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일들로 바쁘다. 우주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하찮은 일들에 불과하겠지만, 인간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중요한 일들이 또 없다. 그리고 이 같은 모습은 비단 1950년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실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그렇잖아. 


그런데도 어찌되었든 우리네 삶은 굴러가고 또 그래야만 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 모든 게 결국 무대 위 연극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렇기에 우리네 삶이 거짓될지언정 결코 하찮지는 않다 말한다. 별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가짜 수염을 붙이고 있던 누군가는 담배 피우며 건너 테라스의 다른 배우와 수다 떠느라 극에 제시간 때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고, 중후한 목소리 톤의 내레이터가 자신의 등장 지점을 잘못 찾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 창조한 일종의 신과 같은 대본 작가는 아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공연은 굴러간다. 외계인이 나타나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우리는 그저 살아갈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그저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아주 큰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넋놓고만 있지 말고, 우리 그냥 살던 대로 살자. 다만 기왕 사는 거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살자.'라고 웨스 앤더슨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 웨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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