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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Aug 02. 2023

매순간이 러시안 룰렛

<위험한 독신녀>

우리네 삶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를 것이고, 많이도 연습하면 그게 운동이 됐든 자동차 운전이 됐든 실력이 금방 늘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 또한 우리네 삶엔 분명히 있다. 대표적인 건 '사람'과 그 '관계'에 대한 문제다. 직장에서 어떤 상사를 만나게 될 것인지, 군대에서 어떤 선임을 만나게 될 것인지, 오늘 들를 가게에서 어떤 사장을 만나게 될 것인지, 이번 주말 모임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지 등은 우리네 노력으로 성취되거나 결정되지 않는다. 좋은 상사와 착한 선임, 호방한 사장, 호감가는 사람 등을 만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쁜 상사와 악한 선임, 옹졸한 사장, 비호감인 사람 등 역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에서의 인간 관계라 함은 그냥 교통사고다. 내 잘못은 없어, 그냥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 날 치고 가버린 거야.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 


<위험한 독신녀>에서는 앨리가 그 교통사고의 피해자다. 그녀의 잘못이라고 해봐야, 바람난 남자친구 대신 함께 월세를 낼 룸메이트를 찾아 신문에 공고를 냈다는 것 뿐이다. "싱글 백인 여성과 함께 살 룸메이트를 찾습니다." 신문에 낸 이 한 줄이 앨리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 짧은 한 줄로 정신이상 살인마 헤디가 방 안으로 굴러들어왔으니 말이다. 정신과 병력을 제외하고 단순 범죄로만 국한해 보아도 헤디의 잘잘못은 세고 세다. 간접적으로만 묘사되긴 해도, 어찌되었든 앨리의 룸메이트가 되기 이전 헤디는 이미 여러 사건들을 저질러온 듯 하니까. 그런데 거기에 앨리는 대체 어떤 잘못이 있는 거냐고. 룸메이트 구할 때 웬 미친년이 순수한 표정을 띄고 찾아올 거란 생각은 보통 잘 안 하잖아. 그것도 나름 면접 아닌 면접까지 봤는데 말야. 


헤디는 정체성 도둑으로서 무서운 면모를 보인다. 룸메이트의 옷장을 몰래 뒤져 옷을 비슷하게 훔쳐 입고, 나중에는 대놓고 헤어 스타일까지 복사해낸다. 평소 브리짓 폰다와 제니퍼 제이슨 리를 보며 서로 닮았다 생각해본 적 없었건만, 영화 속 비슷하게 닮아가는 두 사람을 보고는 나도 헷갈리더라. 특히 두 배우의 하관이 서로 비슷해서, 클로즈업이 아닌 다음에야 구분하기 좀 힘들었다. 그나마 확실한 차이를 보이는 키로 구분 가능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대로 가다간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란 공포가 영화 곳곳에 엄습해있다. 


90년대 초반의 영화들이 으레 그랬듯, <위험한 독신녀>도 섹슈얼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다만 섹스 묘사 등이 노골적이진 않다. 그나마 존재하는 것들도 야하게 느껴진다기 보다는 좀 웃기거나 무섭게 묘사되고. 특히 앨리인 척 샘의 침실을 찾아 그에게 오랄 섹스를 선사하다 끝내는 하이힐 굽을 이용해 그야말로 절정에 보내버리는 헤디의 모습이 웃기다가도 무섭고 또 무섭다가도 웃겼다. 그와중에 제니퍼 제이슨 리 특유의 미친년 연기 미쳤고. 근데 또 브리짓 폰다도 지지 않는다. 막판에 닌자 마냥 천장에서 기습 때리는 장면은 웃기면서 통쾌했고 또 통쾌하면서 웃겼다.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교통사고 무서워 집밖으로 안 나가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생 혼자서만 생활하는 게 불가능한 세상인 만큼, 그에 대한 공포도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한 독신녀> / 바벳 슈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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