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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Apr 06. 2024

시댁 문화와 가부장제를 박살낸
두 모녀

<댐즐>


'여(女)'나 '남(男)'이라는 글자가 앞에 붙는 다른 직업과 그 표현들에 가해지는 비판 여론이 어느정도 이해되는 것처럼, '여전사'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전사'를 직업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더해지기도 한다. 여군인이나 남간호사라는 표현이야, 그 해당 직업군들의 성비가 한쪽으로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쓸 수도 있겠지 싶은데, 사실 '전사'는 직업이라 하기가 좀 그렇잖아. 그 한자어 자체도 싸울 전(戰)에 선비 사(士)이니 그냥 싸우는 무신 계급을 뜻하는 말이지 않느냐 이 말이다. 군인은 몰라도 단순 싸움꾼이란 표현을 직업으로 볼 수는 없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24년이라는 현시점에서 만큼은 난 '여전사'란 표현을 옹호하고 싶다. 물론 여전사는 아직도 남성일색인 액션 영화판에서 여성이 그 주인공으로 희귀하게 다뤄졌을 때 쓰이는 성차별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조금만 틀어 반대로 생각해보고 싶다. 여전히 남성일색인 액션 영화판에서, 여성이 그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극했을 때 우리는 여전사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짐짓 성차별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경외심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이 힘들고 뻐근한 액션 영화계에서 전사로 등극한 여자? 그게 더 훌륭하고 대단한 일이니 최소한 아직까진 그 '여전사'란 칭호가 그걸 얻는 데에 더 난이도 있어 보인다. 물론 장기적 관점에서는 그런 여전사들이 더 많이 늘어나 종국엔 여전사든 남전사든 그런 표현이 아예 없어져야겠지만. 


이야기를 좀 거창하게 시작했는데, 그만큼 <댐즐>의 주인공 엘로디는 그 여전사란 칭호가 어울리는 인물이다. 자신이 여자란 걸 자각하고 그에 가해지는 폭력과 희생에 정당한 반항을 행한 주인공. 최근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 무늬만 여전사인 액션 영화 캐릭터들 중, 그래도 가장 그 칭호의 자격을 가진 캐릭터라 사료된다.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를 <댐즐>은 역으로 이용해버린다. 그게 잠자던 공주를 구한 왕자의 이야기든, 인어 세계의 공주와 사랑에 빠진 왕자의 이야기든 간에 우리 모두는 백마 탄 왕자란 이미지에 너무도 숙달되어 있다. 특히 사악한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내는 백마 탄 왕ㅇ자의 이미지. 그걸 <댐즐>은 십분 활용해 정반대의 반전을 꽂아낸다. 알고보니 백마 탄 왕자와 그 왕족이 사악한 쪽이었고, 불을 내뿜는 용은 위협적이되 그녀 역시도 피해자였으며, 이 모든 걸 견뎌내고 스스로를 구한 뒤 정의와 복수가 적당히 혼합된 듯한 무언가를 행해내는 건 결국 공주란 이야기. 디즈니가 100여년에 걸쳐 쌓아놓은 이야기의 헤리티지를, 넷플릭스는 이토록 영리하게 하이재킹 해간다. 


영화적 재미는 뒷전으로 한채 마냥 여성 혁명 서사로 일관한 작품이었다면 분명 거부감이 들었을 것. 그 점에서도 <댐즐>은 영리해보인다. 전략적 취사선택을 잘한 느낌. 용을 피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동굴 내부를 엘로디가 탐험하는 과정은 호러 장르의 적당한 재현이고, 이어지는 용과의 전면대결은 크리쳐 액션 장르로써의 적절한 변주다. 주인공이 설사 남자였을지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었을 이야기 구조. 그러니까 <댐즐>은 장르 영화적인 기본 재미를 충실히 제공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걸 또 잘 활용했다. 여성이기에 무조건 강하다는 프로파간다적 태도가 <댐즐>엔 없다. 그냥 곧은 심지의 강인한 인간이 주인공인데 그 성별이 그저 여자였을 뿐. 그런데 거기에 순차적으로 입혀지고 신겨진 구두와 코르셋, 드레스 등이 역순으로 점차 찢겨지고 벗겨지는 걸 표현함으로써 그 안에서도 충분히 페미니스트적 서사를 꾸려냈다. 여기에 그녀를 위험 속으로 던져놓은 것도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하는 시댁 문화와 가부장제의 조합. 그리고 결국 그 조합을 무너뜨리고 불태우는 것도 '댐즐'이라는 제목처럼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한 처녀와 과거 자식을 잃어본 바 있던 한 어머니의 조합. 별다른 설명을 가타부타 더해내지 않아도 <댐즐>은 영화적 재미와 주제적 맥락을 훌륭하게 버무려놨다. 


무엇보다 크리쳐 장르의 팬으로서 용의 디자인이 뻔할지언정 멋졌고, 그 강대한 존재와 비교해 한없이 연약했던 주인공이 그를 물리쳐내는 방법도 마음에 들었다. 오해와 거짓말, 강요된 희생, 그리고 계약처럼 진행되는 결혼 문화에 맞서 소통과 진실, 진심어린 희생, 그리고 공감에 의한 협력이 영화의 핵심이었단 게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엘로디와 용은 높게 솟아있던 시-월드의 탑을 통쾌하게 박살내버렸다. 그런고로 난 이 둘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여전사'라 칭송하고 싶다. 


<댐즐> /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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