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스>
그림부터 사진,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적 감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끔 펼쳐내는 이같은 시각예술에서, '구도'의 중요성이란 절대적이다. 구도. 그러니까, 피사체의 형태부터 위치, 색감 등을 고려한 화면상의 짜임새. 어떤 구도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따라 그게 그림이든 사진이든 아니면 영화든 간에 시각예술은 각기 다른 힘과 매력을 뽐낸다. 그리고 그 방면에서, <챌린저스>는 영화계의 대표로 천하제일구도대회에 나가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힘과 매력을 보여준다.
한 여자와 그를 둘러싼 두 남자의 이야기. 뻔하다면 뻔한 그 삼각 관계의 구도를 품고 영화는 달려가는데, 정작 그러한 요소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건 테니스 경기를 통해서다. 복식도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택한 경기의 구도는 단식. 두 남자가 오직 서로를 향해 라켓을 겨누고 공을 날려보낸다. 그리고 경기장의 정 가운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자. 영화의 오프닝 때만 해도 마치 이 경기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뭔가 달관하고 무관심해보이는 태도로 홀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그 여자, 타시. 하지만 네트와 그녀를 사이에 둔 두 남자가 삼각 구도에서 벗어나 과거를 들쳐메고 그들만의 이각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타시 그녀조차도 결국엔 남들과 똑같이 공의 움직임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바삐 옮겨낸다. 그러니까 구도를 주도하던 존재가 끝내는 그 구도에 끌려가게 되는 이야기.
시종일관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삼각 구도가 관계에 감정을 더하고, 여기에 파랗고 하얀 테니스 코트에서의 이각 구도는 그 관계에 긴장을 품어낸다. 그만큼 극중 패트릭과 아트가 벌이는 테니스 경기는 입만 뻥끗 안 했다 뿐이지,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고도 통렬한 대화였다. 우정과 애정, 만남과 이별, 열정과 우울, 승리와 패배,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마치 테니스 공마냥 자꾸 이리저리 튀어대는 육체적 대화. 두 남자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타시, 너까지. <챌린저스>는 테니스란 스포츠를 끌어안은채 엄청난 수다를 풀어간다. 비록 그게 말이 아닌 공으로 하는 수다였지만 말이지.
극중 이야기의 흐름이 왜 비선형적 플롯 구성을 취하고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챌린저스>는 시점상 가장 최근의 일이자 현재인 테니스 토너먼트 결승전을 기점으로하되, 그 사이사이를 여러 과거와 대과거들로 채워놨다. 아트는 이미 타시와 결혼해 아이까지 하나 낳은 이후이고, 여기에 패트릭 또한 근근하게 살아가고 있는 상황. 헌데 여기서 이야기는 자꾸 과거를 끼워넣는다. 대체 왜? 일반적인 스포츠 장르 영화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된 순서를 통해 왕도적인 구성으로 갔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챌린저스>는 현재에 자꾸 과거와 대과거를 끌어다 던져두는가.
기능적 이유로는 관객 궁금증의 극대화 차원이었을 것이다. '관계가 순차적으로 퇴적되어 결국 얻게 되는 결과' 역시 충분히 흥미로웠을 테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결과까지 가 닿게 된 과정과 그 이유'가 때로는 더 궁금할 수 있다. 게다가 타시 이전에도 패트릭과 아트는 친구와 의형제 사이를 넘어 거의 오래 산 부부처럼 보일 정도의 친밀한 관계 아니었는가. 대체 어떤 과정이 있었고 또 그걸 대체 어떻게 거쳐왔길래 그렇게도 가까웠던 이 둘은 이렇게도 멀어지게 된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 자극이 <챌린저스>에는 분명 존재한다.
이야기와 관련한 이유로는 그 모든 걸 다 '운명론'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결국엔 운명이 정한대로 다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흡사 그리스 비극 같은 운명론. 이미 파토난 결과를 다 안 상태에서 목도하는 과정에서의 우정은 그 자체로 강렬한 파토스를 동반하니까. 끝내 타시는 아트와 결혼한단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구경하는 타시와 패트릭의 연애는 보는 것만으로도 쌉싸름한 뒷맛을 안긴다.
갖은 술수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패트릭과 아트의 결승전 경기가 그 무엇보다 솔직해보여 공정하게 느껴졌다는 것 역시 놀랍다. 대학생 시절, 아트는 연애중인 패트릭과 타시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아트야말로 비열한 종자다. 하지만 그 직후, 패트릭은 친한 친구로서 그런 아트의 술수를 곧바로 알아채곤 장난스레 몸싸움을 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승전 경기 전날, 패트릭은 아트에게 져달란 부탁을 타시로부터 받고 그녀와 동침한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패트릭 역시 불량한 쓰레기처럼 보인다. 허나 이 역시도, 다음날 경기에서 패트릭이 아트에게 그 모든 걸 단 한 번의 손동작만으로 고백하게 되면서 깔끔해진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았지만, 경기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솔직했던 두 사람. 그 덕에 그 결승전 경기는 무척이나 공정해보였다.
관계를 주도하면서 모든 이들을 자기 발 아래 두려하는 통제광 타시의 모습부터,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 패트릭과 아트까지 인물들 면면이 상세하고도 공감가능해 영화에 자동으로 마음이 갔다. 특히 패트릭. 나는 패트릭이 그 날 그 사우나에서 했던 말들이 그의 진심이었을 거라 믿는다. 같잖은 심리전 따위가 아니라, 패트릭은 아트와 오랜만에 테니스를 함께 하게 되어 정말로 기쁘고 기대된다 생각하지 않았을지. 그 당시의 아트는 그걸 믿어주지 않았지만, 결승전 경기의 가장 마지막 시점에서 아트를 꽉 끌어안은채 활짝 웃고 있던 패트릭의 얼굴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그게 그의 진심이었을 거라 믿을 수 밖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보며, 나는 늘 그가 여전히 소년성을 간직한 감독이구나- 하고 느껴왔다. 그런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이어 <본즈 앤 올>, 그리고 이번 <챌린저스>까지 보니 루카 구아다니노는 언제나 청년이란 생각이 들었다. 1971년생의 중견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랑스러우면서도 자기파괴적인 강렬한 청년들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그. 이쯤되면 루카 구아다니노는 대체 어떤 청년기를 보냈던 걸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