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과연 고전답게, 그간 메리 셸리의 대표소설은 수많은 실사화를 거쳐왔다. 그중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중심으로 호러를 펼쳐나간 작품도 있었고, 또 B급 감성을 더해 액션이나 코미디로 나아간 작품들도 있었지. 심지어 팀 버튼은 동일한 이야기를 강아지로 재해석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그 긴 역사를 지나, 2025년의 기예르모 델 토로는 메리 셸리가 펼쳐낸 청사진 위로 자신만의 비전을 펼쳐보인다. 조금의 호러와 가끔의 액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굴레를 핵심으로 삼은 작품.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에 빗대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원작소설을 제대로 잇는 적장자라고.
부녀와 모자 사이엔 비교적 옅은 긴장이, 유독 부자 관계에 있어선 견고해진다. 예전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자면, 한 무리 안에 두 명의 우두머리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서로에게 많은 상처와 무응답으로 일관된 묘사가 주였다. 그리고 그 정점에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이 선다. 원작소설과 그 전의 선배 영화들 역시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으레 부자로 설명해왔다. 하지만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거기에 인정과 용서까지 가미함으로써 가히 절정에 이른다.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로인해 그간의 오해를 타파하고, 거기다 각자를 인정한채 용서하는 결말. 원작소설과 그간의 선배 영화들은 나아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델 토로는 뾰족하게 전진했다.
빅터의 서술에 따르면 그 아버지는 냉정하고 필벌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어린 빅터를 자신같은 의사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가르치면서도, 훗날 의술을 행하기 위해선 손 관리를 잘해야한단 명분으로 혼낼 때 손바닥 대신 무려 얼굴에 회초리를 갈기던 사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빅터에게 유일한 희망과 쉼터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빅터의 세계는 뒤틀리고야 만다. 그래,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하던 내 수중의 의학기술로 어머니를 앗아간 죽음과 기필코 대적해내리라. 죽음을 정복하겠단 빅터의 그 뒤틀린 욕망은 결국 여러 시체들을 하나로 꿰어내 누더기 같은 피조물을 빚어내는 것으로 이어지고.
누군가 말했다, 자식은 둘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고. 부모와 비슷하게 살기로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부모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이중의 선택지. 그리고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살아본 우리들은 으레 후자를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인생 전체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겠다는 선택이 만약 과하다면, 부모의 특정 행동이나 습관 등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정도로도 후자를 선택한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다보면 우리 DNA에 각인된 유전자는 자신도 모르는새 발현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어느순간 우리는 결코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의 한 조각을 스스로에게서 목도한다.
그러니까 빅터도 마찬가지다. 일찍 여읜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예비 제수 엘리자베스에게 이끌리게 된 건 패륜에 불륜임을 감안하더라도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다. 심지어 빅터의 어머니와 엘리자베스 모두 미아 고스가 1인 2역으로 연기하면서 그같은 감정을 뒷받침하고 있고. 하지만 아버지는? 회초리로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던 그 매정한 아버지는? 빅터, 너 분명히 어렸을 땐 훗날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리라 결심하지 않았겠니? 하지만 자신만의 피조물을 완성한 빅터는 어느새 아버지에 빙의되어 아들과도 같은 존재에게 매를 휘두른다. 심지어 사슬에 수갑까지 채우고 멍청하단 이유로 한심해한다. 이 정도면 아버질 닮은 걸 넘어 능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아버지는 후사를 위해 2세 임신과 육아를 계획하기라도 했지, 빅터는 막상 피조물 창조에 성공한 이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임신과 출산까지만 생각해두고 육아 및 교육할 생각따윈 전혀 없었던 셈.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빅터와 피조물 모두 각자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꾸린다. 그리고 이후 덴마크 탐험선 선장실에서 그제서야 각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영화적으로 그 두 관점의 이야기 모두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델 토로는 피조물에게 원작엔 없던 불멸성을 부여했는데, 그로써 인생의 동반자를 원하는 그 욕망과 외로움이 한층 더 깊어졌다 생각. 이 정도면 진짜 각색으로 개량된 버전이라 할 만하다.
영화적 만듦새가 최고 수준이란 생각 역시 든다. 언제나 디테일에 천착해왔던 델 토로의 영화답게, <프랑켄슈타인>의 시청각적 묘사는 가히 완벽하다. 빅터의 연구실부터 덴마크 탐험선 내부까지 프로덕션 디자인이 훌륭하고, 인물 면면을 다 은유하는 의상들의 질 또한 충격적으로 좋다. 여기에 CG나 음악 등에 들인 공도 눈에 띄고 귀가 트이는 수준. 굳이 꼬투리를 잡자면 피조물의 외형 디자인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 아닌가 정도가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물론 관객들에게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했기에 선택한 디자인이었겠지만, 그래도 너무 아름답기만 한 것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꼬투리다.
사실 이 영화를 더 감명깊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얼마 전에 나도 아들을 낳아 아버지가 되었거든. 신생아를 돌보면서 벌써부터 행복하고 기쁜 순간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인간이다보니 현실적으로 힘든 때도 분명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당연히 아기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욕을 한 건 아니었지만, 짜증은 좀 냈던 게 사실이다. 그 짜증 표현의 대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대체 왜 우는 거야!" 우는 이유를 몰라서 그랬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생각도 좀 들었던 것 같다. 어차피 지금 짜증내도 신생아 상태인 얘가 이후 이걸 기억할리 만무하잖아.
극중 피조물은 빅터에게 '빅터'라는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배운다. 그래서 내내 '빅터'만을 연발한다. 처음에 빅터는 그를 대견히 여기지만, 이후 피조물이 여전히 '빅터'라는 한 단어 밖에 말하지 못하자 짜증과 화를 낸다. 이를 엘리자베스가 나무라자, 빅터는 "어차피 얘는 기억 못 해!"라 답한다. 거기서 이어지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당신은 기억하잖아요." 그리고 피조물이 '빅터'란 한 단어 밖에 내뱉지 못한다는 빅터의 볼멘소리에 연속기로 들어오는 엘리자베스의 답변 역시 걸작. "지금은 그 단어가 그에게 전부일 테니까요." 나는 거기서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아버지와 내 아들 사이에서, 어느덧 나도 아들과 아버지의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 접어든 지금,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아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부, 아버지인 빅터를 떠나보낸 직후 피조물은 마침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다. 태양, 그러니까 'sun'. 'Sun'은 피조물에게 빅터가 자신의 이름 다음으로 가르쳐준 단어였다. 그리고 영단어 'sun'의 발음은 '썬'이고, 이는 또다른 영단어 'son'과 동일한 형태를 띈다. 'Son'은 아들을 뜻한다. 아버지를 인정하고 용서함으로써, 스스로의 미추 역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아들의 이야기.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유명한 고전소설의 새로운 집대성이며, 감독 본인이 세운 새로운 기준이다. 이런 게 시네마가 아니라면 대체 세상 무엇이 시네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