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동진이 말했듯, 세상 모든 관계의 아름다움엔 우정이 있다. 친구를 뜻하는 벗 우(友)를 써서 그렇지, 우정은 친구사이를 넘어 가족과 동료 심지어는 연인관계에 있어서도 넓고 깊게 깃든다. 부모 자식 또는 형제자매 간에 우정이 없다면 그것은 콩가루 집안일 것이요, 동료 사이에도 우정이 없다면 그건 그냥 일하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친구끼리 우정이 없다면 그건 또 지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 역시 감히 그렇다. 우정이 없는 연인이란 육체적 관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두 주인공일 해리와 샐리. 두 사람은 누구의 노랫말처럼 사랑보다는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운 관계를 실로 오랫동안 유지한다. 그럼에도 해리와 샐리는 각자의 동성친구에게 서로를 절대적 친구일 뿐이라 말하며 제한한다. 그러나 동양보다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서양 문화라 할지라도 그 둘 사이는 좀 기이하게 과하다. 마치 성별 따위 진작에 초월해버렸다는 듯, 두 사람은 각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서로의 집에 아주 늦은 시간에도 스스럼없이 방문한다. 심지어 울고 있는 샐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해리는 그녀의 침대도 마치 원래 같이 공유하기라도 했던 것인양 당당히 올라가고, 그것이 서양의 문화라 할지라도 역시나 인사예절을 넘어선듯 보이는 서로간의 가벼운 키스 역시 절대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두 사람 또한 그 키스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알아차린 것인지 바로 뜨거운 하룻밤 보내기에 들어가고.
육체적 관계를 맺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좋은 친구를 잃을까봐 또 샐리를 멀리하는 해리. 그 때문에 샐리 역시 좋았던 지난 밤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이르고, 오래도록 쌓아온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귀결이 으레 다 그렇듯, 당연히 두 사람은 다시 연인으로서 이어지며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그러나 결코 당연하다 볼 수 없는 부분은,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실된 우정으로 대하며 몇 년여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우정의 퇴적층이 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바로 그 로맨틱 코미디의 해피엔딩을 쟁취해낼 수 있었던 거지.
영화를 보며 돌이켜보았다. 내 인생에 그런 우정을 나눈, 또는 나눌 수 있는 친구는 과연 몇이나 되고 또 누구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관계를 초월해서 말이다. 나의 천박하고 경솔한 습관을 이미 다 알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해해주는 사람.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내 취향은 어떤지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내가 정말 힘들 때 정성껏 위로해주고 반대로는 기쁠 때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과연 있는지 어줍잖게 셈해보다가, 이내 나는 그들에게 그래주고 있는지 돌이켜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어쩌면 이 유치한 생각을 가만히 하고 있자니, '우정'이라는 두 글자가 갑자기 실로 아름답게 느껴져왔다. 우정, 우정... 너무 아름다운 두 글자라 곱게 닦아 빛나도록 전시해두고 싶어졌다.
좋은 우정은 그렇게 우리를 아주 멀리로 데려다준다. 심지어는 사랑으로도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담아냄으로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영화사의 고전이 되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재감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헌데 얼마 전, 이 고전이 된 작품을 연출한 감독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노환이나 병사, 아니면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됐다면 그저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됐구나 싶었을 터인데 사인은 피살. 심지어 그 살인 피의자는 감독의 친아들. 여러모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그 사건은 이미 뉴스 등을 통해 많이 전달되고 있으니, 여기서 내가 더 가타부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그냥 추모하고 싶었다. 그리고 예술가의 죽음이었으니, 기왕이면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추모의 인사를 남기고 싶었다. 최근의 활약이 뜸해서 그랬지, 롭 라이너는 정말이지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낸 거장이었다. 특히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로 시작해 <스탠 바이 미>, <프린세스 브라이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그리고 <어 퓨 굿 맨>이라는 연속적인 커리어는 정말이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다 훌륭한 영화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특히 <어 퓨 굿 맨>을 애정한다. 영화사에 손꼽히는 명작일 뿐더러 그 작품을 통해 보여준 연출 또한 절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을 기리며 딱 한 작품을 골라 봐야한다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좋겠지 싶었다. 다른 작품들도 정말 다 좋지만 그래도 컬트 코미디나 싸이코 스토커 이야기, 군 내부 비리와 살인을 다룬 법정 드라마 보다는 좋은 우정의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준 달달하고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가 개인적으로는 롭 라이너의 마지막을 기리는 데에 더 알맞게 느껴졌다. 감독님, 멋진 우정과 예쁜 사랑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랑스러운 두 주인공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