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에도 깃든 인간의 마음

<천국과 지옥>

by CINEKOON


제화 업체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사내의 중역 곤도가 사는 집을 찾아온 다른 중역들. 그러나 곤도는 따로 준비해둔 비밀 거래를 통해 본인이 회사의 경영권을 움켜쥐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네 명의 중역들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웬 유괴범은 곤도의 어린 아들을 납치하고 그에게 전화해 몸값을 요구한다. 그 금액은 무려 3천만 엔! 그 돈이 없으면 곤도는 사내 경영권 확보는커녕 회사에서 내쫓기는 처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유괴범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몸값을 지불하겠다 단언하는 곤도. 그러나 알고보니 유괴범이 납치한 건 곤도의 아들 쥰이 아니라 그 친한 동갑내기 친구이자 곤도가 고용한 운전기사의 아들인 신이치였다는 게 밝혀진다. 이후 경찰들까지 개입한 상황에서 곤도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아이를 위해 회사내 권력과 전재산을 모조리 버려야만 하는가. 아니면 유괴범의 실수로 쥰 대신 잡혀가게 된 신이치가 그냥 죽도록 내버려둬야만 하는가.


<천국과 지옥>은 그 시작에서부터 엄청나게 강력한 딜레마 하나를 들이밀며 시작한다. 그 딜레마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주 사건이 일차적으로 해결되는 영화의 중반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거의 두 시간 반짜리의 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탱하는 복잡간결한 딜레마의 힘.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뭔가 짧고 굵은 선 하나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언제나 이토록 강렬하다.


어린아이 유괴사건을 다루고 그 몸값 지불에 따라 파산하게 생긴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보니, 어떻게 보면 영화의 제목 속 '지옥'이란 이 상황 자체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천국'은? 영화가 그려내는 주인공 곤도의 이야기 중 그리 천국 같은 상황은 없던데? 아-, 그렇다면 영화 제목 속 '천국'과 '지옥'은 곤도와 유괴범 긴지로의 경제적 상황을 은유하는 말이렷다? 부자인 곤도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언덕 위 전망 좋은 집에 살며 에어컨 바람을 즐기고, 빈자인 긴지로는 그 언덕의 저 아래에 있는 낡은 집에서 더위에 허덕이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이러한 해석 역시 뭔가 얄팍하다. 돈 많으면 천국이고 돈 없으면 지옥이란 소린가? 현실적인 관점에선 일정부분 맞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그 부분만 냅다 조명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사내 정치를 통해 회사를 통째로 먹을 심산이긴 했으나, 곤도는 범인(凡人)이라면 감히 해내지 못할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아들도 아닌 다른 이의 아들을 위해 파산을 감내한 것. 자고로 그 사람을 드러내는 건 내뱉는 말도, 단지 품고만 있는 마음도 아닌 행동이다. 곤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선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 하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곤도는 그 선한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의 선택을 존경하는 이들이 생긴 것. 경찰들은 곤도의 사건을 정말이지 성실하게 수사했고, 기자들 역시 그에 힘을 보탰다. 여기에 수많은 시민들의 응원은 덤. 그렇게 결국 곤도는 운전기사의 아들도 구해내고 추후엔 몸값도 돌려받아 파산을 면한다.


반면 긴지로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 역시 곤도와 마찬가지로,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진 중요치 않다. 그가 가난해서 힘들었는지, 원래는 착했으나 점차 삐뚤어진 것인지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저 그가 악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는 신이치를 유괴했을 뿐만 아니라 공범들을 마약과다투여로 사망케했다. 여기에 그 약의 효과를 시험하려 거리의 부랑자를 죽인 것은 덤.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 이후 잔뜩 긴장해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국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곤도에게 보란듯 담뱃불도 빌리지 않나. 극중 형사 토쿠라의 말마따나 그는 응당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악인이다.


그러니까 뻔한 주제이긴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권선징악을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곤도의 선한 행동은 곧 영화 제목 속 '천국'이고, 긴지로의 악한 행동은 즉 영화 제목 속 '지옥'이다. 천국과 지옥, 그 어디에도 깃든 인간의 마음. 상태나 상황 뿐만 아니라, 특정 의도를 지니고 행한 행동 역시 천국 또는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토록 간명하면서도 확실한 진리를 엄청난 장르적 긴장감과 능수능란한 테크닉으로 선보여냈다. 그것도 무려 1963년에. 누군가가 전설인 데에는 언제나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천국과 지옥> / 구로사와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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