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의 일생>
정현종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말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세 개의 챕터가 역순으로 진행되면서 <척의 일생>은 알쏭달쏭 미스테리를 만들고 또 이끌어 나간다. 헌데 그 미스테리의 주 재료들이 저마다 완전히 다른 무게감으로 한데 모여있어 절로 흥미가 동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놀랍도 또 두려운 우주의 종말, 그리고 그에 비하면 한없이 미시적인 한 사람의 경험과 추억, 그리고 춤. 온 우주가 그 빛을 소등해갈 때에도 누군가의 삶은 회광반조마냥 이토록 환히 빛난다.
이야기의 핵심이 되어주는 미스테리가 썩 스티븐 킹답고, <닥터 슬립> 이후부터 그의 작품들을 영상화하는 데에 어느 순간 도가 튼 듯한 마이클 플래너건의 차분하면서도 감성적인 연출이 세심하다. 톰 히들스턴을 위시한 등장배우들의 연기도 다들 좋고. 그 세 가지가 합일되며 장면마다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척의 일생>은 확실히 보는 맛이 있는 영화다. 로저 디킨스의 멋드러진 조명이나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화려한 촬영에는 비할 바 없이 담백하지만, 화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담담하게 서술되는 척의 과거들은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의 옛 일들을 떠올리게 만들며 그 보는 맛을 만든다.
영화를 보며 단순히 기다리는 삶과, 그럼에도 그 안에서 추억하는 삶의 질적 차이를 느꼈다. 똑같이 끝을 알더라도,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인생은 변한다. 그저 기다리는 자의 삶은 종종걸음이며 불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추억하는 자는 그 추억의 양만큼이나 현재를 즐길 줄 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 또한 미래의 어느 순간엔 '과거'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그 '과거'는 추억의 장작임을 알기에. 그래서 추억하는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맞서며 춤을 출 수 있다.
어쩔 수 없게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만을 생각하고 산다. 내 삶에서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 과거들은 그 이야기의 재미난 에피소드들로 남는다. 우리는 자기만이 10년, 20년, 혹은 60년을 살아왔다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에게는 그런 과거가 있었음을 우린 종종 잊어버린다.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자신 못지 않게 타인에게도 그만의 역사가 존재하기 마련. 내가 보지 못한 내 부모의 과거, 내가 듣지 못한 내 친구의 경험, 내가 짐작조차 못한 지하철 옆자리 저 사람의 추억.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우주의 먼지인 동시에 저마다 하나의 우주이기도 한 우리를 위하여. <척의 일생>은 각자의 우주가 그 빛을 잃기 전에 지금의 '현재'를 즐기며 춤추자 말하는 영화다. 동시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겸허해진다. 다시 한 번 정현종 시인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에겐 일생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에겐 역사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우주에서 감히 춤출 자격이 있으니까. 내가 오늘 만난 사람이 생물학적 단일개체 인간이 아니라 역사학적으로 하나의 우주였음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감히 춤출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