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우리 젊은 날>
안성기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다시 돌려본 영화는 <라디오 스타>였다. 그런데 거기서 끝내자니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 오늘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봐야지. 거의 15년 전에 처음 봤던 영화였는데, 1987년 영화임에도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제목처럼 젊었었다. 그리고 약 15년이 흘러 다시 본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놀랍게도 여전히 젊은 모습이었다. 언제 보아도 시대를 초월해 젊을 영화의 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젊은 영화의 모습에, 나는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수채화처럼 그려내는 '젊은 날'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그래서 되려 범용적이고 공감을 산다. 왜 젊은 날의 우리는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온 상대 앞에서 서성거리고 쭈뼛거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왜 그 앞에서 머뭇대고 어물쩡대며 어색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우리 모두는 우리의 바로 그 때 그 시절을 알고 있고, 그런 그 시절이 번갯불처럼 불현듯 떠오르는 밤이면 반사적으로 덮고 있던 이불을 뻥 차며 뒤늦은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왜 그랬을까, 나는 그 때 왜 그랬을까...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다. 인간이란 자신의 그런 과거에 대해선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정작 타인의 그런 모습을 구경하면서는 연민하는 마음을 가지니 말이다. 30대인 나는 심지어 <기쁜 우리 젊은 날> 속 영민의 그 불안한 순간들이 짐짓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바로 그 감상은 부메랑처럼 다시 우리의 경험에로 돌아온다. 내가 지금 영민을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깃든 아름다움을, 또다른 누군가는 과거의 내 모습을 보고 또 떠올리지 않을까. 과거는 윤색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정갈해진 추억은 우리 모두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고통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시킨다. 어린시절에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둬야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차곡차곡 추억들을 비축해두어야, 어른이 되어서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항상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들은 우선적으로 과거에 존재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그렇다. 연극에서 자신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혜린은 대사를 빌려 말한다, 과거의 일 따위 이야기해서 뭐하겠느냐고. 나는 잠에서 깨 샌드위치를 먹으며 산책하는 지금이 좋다고. 하지만 그런 인물마저 결국엔 곧바로 과거의 아름다웠던 낭만을 고백하듯 추억하며 꺼내놓는다. 그 장면 이후로 마찬가지다. 영민이 혜린을 처음 보게되고 또 사랑에 빠져드는 바로 그 순간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로써 영화의 바깥에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영민이 혜린에게 사랑을 느낀 시간마저도 과거에 있다. 여기에 영민 아버지가 그 아내와 나눴던 추억 역시 마찬가지고. 그처럼 그 때 그 당시엔 찌질하고 괴롭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돌이켜봤을 땐 그마저도 기쁘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 바로 젊음의 힘이고 우리들의 젊은 날 아닐까 생각해봤다.
내용적 측면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훌륭하다. 필름 촬영이 전부였던 그 때 그 시절의 다른 고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기쁜 우리 젊은 날> 역시 당시의 기술적 한계에 갇혀 그 안에서 들기름 짜듯 짜낸 끝에 고여나온 아이디어들이 풍부한 맛을 낸다. 쇼트를 쪼개지 않고 하나의 카메라 움직임 안에서 영화의 전체 주제를 대변하고 또 요약해낸 오프닝부터, 컴포지션이 멋스럽게 구축된 비 오는 날 슈퍼마켓 장면이나 혜린의 회사 앞 장면 등이 감미롭다. 어쩌면 기술적 한계는 예술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담보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러나 저러나, 결국엔 다시 안성기 이야기로 돌아온다. 황신혜의 미모와 연기도 멋지고, 최불암의 차분하되 든든한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안성기의 앳된 얼굴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운명을 타고났다. 사랑하는 혜린을 멀찍이서 그저 바라만 볼 때, 다가가서 말 붙여볼까 하다 타이밍을 놓치곤 당혹스러워 할 때, 되도 않는 임기응변 거짓말이 곧바로 탄로날 때 등의 표정들이 너무 섧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준비한 작은 선물 하나만을 남기곤 도망치듯 레스토랑을 나가다 혜린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는 영민의 표정. 나는 그 표정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그리고 기뻤던 안성기의 젊은 날을 추억할 테다. 뭉근하게 우릴 품어주던 그 얼굴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영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