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같던 너를 따라 나는 달라졌어
001.
“나는 여름이 제일 좋아.”
그의 한 마디에 계절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만 관점과 취향은 조금씩 바뀌나 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괜히 따라 하고 싶은 마음. 여름을 사랑하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어도 여름을 달리 보기 시작하도록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이다.
왜 청춘 영화 속 주인공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여름을 닮았다고 묘사하는 걸까. 그가 여름을 좋아한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여름과 닮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화창하고, 청량하되 뜨거운 사람.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와 추억을 쌓다 보니 어느새 나도 여름을 닮아가고 있었다. 여름을 사랑하고 있었다.
과거엔 따뜻하고 온화한 봄이 좋았다. 예나 지금이나 낙엽이 떨어지고, 시들고, 춥고 메말라가는 가을 겨울엔 정을 붙일 수가 없다. 새싹을 틔우고 온 세상이 연둣빛이었던 날들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조금 더 녹음이 우거지고 푸르름이 절정에 달하는 여름이 제일이다. 계절 순서대로라면 나이를 더 먹게 된 후엔 가을을 좋아하게 될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스물하나 둘. 어쩌면 가장 활기 넘쳐야 했을 그 시절에 ‘내가 가진 에너지는 여름처럼 뜨겁고 찬란한 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여리여리한 봄이라면 모를까 싱그럽고 왁자지껄한 여름은 나와 어울리지 않은 계절이라고 여겼다. 외향인을 벅차하는 내향인처럼 더위는 숨 막히고 더위를 즐기는 사람은 버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머리를 세게 치고 간 한 줄기 생각.
‘대체 누가 나를 그렇게 규정했단 말인가’
다소 낯가림이 있는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려운 소심한 인간이었을 뿐인데. 왜 다들 처음 만나자마자 내게 ’조용하고 잔잔한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평가를 했는지. 그들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친한 친구들은 백이면 백 ‘첫인상과 가장 다른 아이’라고 말하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잘 놀고 말이 많은 애인 줄은 몰랐다고.
“네가 차분하다고? 무슨 소리야. 너는 경쾌한 사람이지. “
이런 억울함과 반항감이 폭발하던 와중에 ‘인간 여름’인 그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이스 타이밍. 늘 곁에 있던 그는 그저 ‘에너지 넘치는 애’였는데 유난히 그즈음에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그를 향한 부러움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문득 찾아온 설렘이었을까. 결국 끝끝내 사랑이었지만. 나는 그를 닮기 위해, 여름에 공감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달라지기 위해 여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항상 적극적이었던 그 애처럼, 언제나 파릇파릇한 여름의 생명체들처럼 살아보는 것.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해야 할 말은 했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었다. 손 들고 발표하려면 열 번은 상상하고 겨우 시도했었는데 대뜸 손부터 들어보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춤도 추기 시작했다.
원래 내 것이 아닌데 ‘척’을 하게 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로부터 10년 넘게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여름이 좋다. 거 봐, 내 안엔 뜨거움이 있다고. 에너제틱한 사람이라니까.
한 가지 반전은, 여름 같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그가 사실은 포근하지만 차디찬 겨울이기도, 쓸쓸하고 고독함을 숨긴 가을이기도, 그저 따뜻한 봄이기도 했었다는 것. 어쩌면 여름을 닮고 싶어서 그를 내 맘대로 여름이라 정의했던 건 아닐지. 그런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나는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고 계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계절과 닮아가고 있으니까.
그가 내게 여름처럼 빛나는 방법이라고 알려준 건 딱 하나다. 용기를 잃지 않고 밝은 내일을 믿는 것. 아니, 혹은 그가 내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준 건가. 어느 쪽이든 이건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된다. 언제라도 어디라도 모든 계절에 필요한 인생을 살아가는 비법일 뿐.
수 십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름을 ‘진짜’ 좋아하는 건, 여름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팔팔한 생기와 그것을 조명 삼아 빛나고, 여름이 주는 용기를 얻어 활기차지는 에너지와 웃음 때문이 아닐까. 남은 계절을 잘 버티기 위한 긍정의 힘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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