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디 단 ‘피치 코블러(peach coobler)

지구 반대편의 여름에서 (2)

by 유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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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여름을 떠올리다가 생각 난 요리가 있다. 피치 코블러. 코블러(Cobbler)란, 과일과 비스킷 반죽을 활용해서 굽는 일종의 떠먹는 과일 파이 같은 거다. 지금은 각종 디저트를 섭렵한 빵순이지만, 8년 전의 나에겐 감도 안 오는 생소한 디저트였다.


“하이킹 갈 사람은 가고, 숙소에 남은 사람들은 같이 식당에 가서 ‘피치 코블러’를 만드는 게 어때?”

“코블러가 뭐야?”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던 베이킹을 제안한 여자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에 머리를 묶어도 잔머리가 곱슬거렸다. 오래 머물지 않고 지나가던 여행객이라 깊게 친해질 기회는 없었지만 내 또래였고 아마 영국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숙소 주변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올레길, 둘레길 같은 하이킹 코스가 많았다. 근처에는 작은 숲과 호수, 그리고 정원이 있어서 주말이면 간단한 샌드위치를 싸들고 삼삼오오 피크닉을 갔다. 그러나 그날은 빛나는 날씨와 반대로 내 기분은 이유 없이 저기압이었다. 피크닉이고 뭐고 드러누워 잠만 자고 싶었는데 생전 처음 듣는 음식을 함께 만들자니. 심심한 데 같이 가보자던 친구의 손에 이끌려 터덜터덜 식당으로 향했다.


거의 10 년은 책장에서 묵은 걸로 보일 만큼 종이가 누렇고 야들 거리는 레시피 북을 폈다. ‘오늘의 셰프’를 자처한 여자는 크러블이 뭔지도 모르는 내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복숭아부터 깨끗이 씻고 자르라고 유럽의 당도 높은 복숭아를 한 아름 건넸다.


생각보다 만드는 과정은 쉬웠다. 파이를 구울 수 있는 팬에 절인 복숭아 조각들을 펼친 뒤 반죽을 붓고 오븐에 구우면 끝.


“우리나라에선 여름에 이걸 많이 먹어. 집집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해 먹는 홈 디저트지. 남은 과일을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거든. 복숭아가 아니어도 돼! 살구, 자두.. 무엇이든 괜찮아 “


사실 반죽을 복숭아 조각들 위로 덜어낼 때만 해도 ‘이게 뭐지’ ‘엄청 질척 거리는데’ ‘반죽이 모자란 거 아냐..?‘ ’복숭아만 들어갔는데 맛이 있을까?‘라고 의아해했다. 가장 당황했던 건 파이라면서 모양이 예쁘지 않았다는 것. 그냥 투박하고 덕지덕지 엉겨 붙은 복숭아 밀가루 범벅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걸 모두가 먹는 저녁 메뉴에 내놓자고?! 말도 안 돼!!


오븐에서 막 나온 코블러는 향에서 이미 기분을 좋아지게 했다. 어라? 노릇노릇한 파이 반죽과 불긋불긋 복숭아가 희한하게 잘 어우러진 덕에 눈으로만 봐도 입맛을 돋웠다.


“와-. 괜찮네? “

“이 레시피 북을 꼭 사진 찍어 가서 한국에서도 해 봐! 너도 만들어서 알지만 달콤한 과일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


때마침 하이킹을 다녀온 무리들이 도착했다. 서둘러 저녁 준비를 마치고 각자 접시에 음식을 담아 식탁에 둘러앉았다. 뷔페처럼 여러 요리를 덜어 먹었는데, 코블러를 한 스쿱씩 퍼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근거렸다.


“우리가 낮에 만든 코블러 어때?”

“너도 같이 만든 거야? 너무 맛있는데! 우리 할머니가 해 주시던 맛이 생각나는 걸”


여기 사람들이 다 착한 건가 싶을 정도로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들의 말을 듣자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평소엔 언어의 장벽 때문에 말 수가 절로 없던 내가 비로소 마음속의 말들이 엉터리 문법을 거쳐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휴-. 다행이다! 나는 정말 두려웠어. 처음 만드는 요리인데 그것도 20인 분을 만들다니! 물론 셰프가 있었지만 그래도 사실 진짜 긴장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거 진짜 맛있네! 한국에서도 해 봐야지..”


영어로 조잘대는 나를 가만히 보던 또 다른 남자애가 대뜸 말을 걸었다.


“뭐야, 너 영어 잘하는 줄 몰랐어! 우리 내일 바다에 수영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피치 코블러를 만들고 나니 외국인들과의 해변 피크닉이라는 또 다른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흔쾌히 대답했다.


"Yes!!"


내면을 알차게 채우면 무엇이든 괜찮다. 심지어 복숭아들도 당도 높은 과즙을 온몸에 응축하고 있다. 여름의 햇살을 가득 받은 과육 그대로는 달콤한 축복이며, 혹여나 냉장고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되더라도 순식간에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피치 코블러로 재탄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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