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르음- 늘리기

입추가 지나면

by 유마치



004.


입추가 지났다.

글을 쓰겠다고 몇 해 전의 여름부터 뒤적거리는 동안 올해의 여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름이 지고 있다는 건 태양으로 알 수 있다. 분명 6시에 퇴근을 하고, 운동을 끝내고 7시 50분에 밖으로 나오면 핑크빛 노을과 시끄러운 매미들이 나를 반겨주었는데. 불과 며칠 만에 해는 이미 넘어갔고 어두컴컴한 저녁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속상하고,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다. 여름을 좋아하는 건 낮이 길었기 때문인데. 태양에 빛나고 반짝이는 것들을 오래오래 느낄 수 있어서였는데. 모두들 봄, 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았다고 볼멘소리로 말하지만 내겐 여름이 조금만 더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 물론 여전히 한낮에는 폭염에, 밤에는 열대야로 신음한다. 이러다 곧 여름이라는 계절은 공포의 시간이 되겠구나 싶을 만큼 지구는 무섭도록 펄펄 끓는다.

그래도 낮이 길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그래도.


이 시기가 되면 마치 인사처럼 한 번쯤 오가는 이야기가 '선조들의 위대함'이다.


"조상님들은 참 신기해. 지금보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절기를 이렇게나 기가 막히게 딱딱 맞췄을까. 이것 봐, 입추가 지났다고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게 숨통 트이는 걸 좀 보라고."


"그러니까요. 뭘 했다고 벌써 입추인지. 이러다 곧 추석이잖아요."


"괜찮아. 말복은 지나야 더위가 한 풀 꺾이더라. 그리고 요즘엔 추석 때도 반팔 입잖아!"



시간이 빠르다는 영양가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속으로 '휴가가 남아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입추와 말복이 찾아오면 하는 일이 있다. 가능하다면 마지막까지 추억을 쌓고, 악착같이 여름을 늘어뜨리는 것. 내 몸과 마음이 '아, 아직 여름이구나-'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여름휴가' 하면 가장 생각나는 것 중 하나인 수영장에 다녀왔다. 한낮의 야외 수영장에서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물속을 헤엄친다. 물에서 나오면 공기가 후텁지근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걸 보니 '아직 한여름이네'라고 안심한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끼고 선베드에 누워 뙤약볕에 15분 정도 일광욕을 하고 있으면 알 수 있다.


'여름이 끝났다고 괜히 걱정했구나? 어우, 더워 죽겠네.'


그렇게 태양 아래 누워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저들도 모두 행복해 보여서 내 감정까지 행복이 퍼지는 걸까. 올해 여름도 물에서 놀았으니 제대로 보냈다는 요상한 안도감, 그리고 행복한 기억을 또 쌓았다는 고마움이 피부에 방울방울 맺힌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며 선글라스를 코에 반쯤 걸치고 배달앱을 켜는 친구의 말에 저항 없이 웃음이 터지고, 입추의 현실로 돌아온다. 계절과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포근한 수건을 어깨에 두른다. 여름은 이토록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나는 계절임에 틀림없다.


계절을 하루 이틀 사느냐고, 올해 여름만 여름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새겨진 습관이다. 세상에 태어난 지 10 년도 안 됐을 시절부터 '여름 방학 계획'을 세우라고 시계 모양 동그라미 하나 덜렁 그려진 백지를 내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면 늘 한 사람씩 손을 들고 방학 지낸 이야기를 말하게 했다. 웃음이 흘러넘치는 여행을 가든, 이때를 기회삼아 열심히 공부해 남들을 앞서 가든,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그마저도 견디든. 무언가로는 꼭 채워야만 하는 시기였다. 여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건 직장인인 지금이나, 코찔찔이던 그 때나 마찬가지다. 절기를 짚어내는 선조들의 지혜가 옳았듯, 학교 밖에서 자연과 세상을 배우라는 선생님의 선택도 옳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서 입을 댓 발 내밀었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사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로 돌아가도 별 탈 없이 친구들과 재밌게 놀 거라는 걸. 싫어도 열심히 공부할 거라는 걸.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방학이 좋은 걸 어떡해. 몸만 커버린 어린애지만 그래도 직장인의 특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놀 계획은 스스로 잘 세운다는 거다. 방학 계획표 열 장을 줘도 다 채울 수 있다(물론 시간과 돈이 없다는 현실은 잠시 잊는다면 말이다). 입추가 지났으니 뜨거운 여름은 곧 태양 저 편으로 사라진다 해도, 길고 긴 낮을 저녁이 삼켜버린다고 해도 조금만 더 여름을 붙잡아 보자. 에어컨 틀 때까지는 아직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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