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구원하려고?
005.
모두가 여름을 알차게 보내는 건 아니다. 그리고 알차지 않아도 괜찮다. 몸을 바삐 움직여 즐기지 못한다면 마음을 가득 채우면 되니까.
누구에게나 멍하니 흘려보내는 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계획 없이 맞이한 여름 방학이 내겐 그랬다. 아르바이트도 관두고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누워 생각했다. 방학 동안 노는 것 말고 뭘 해야 하지. 다른 동기들은 취업한다고 어학공부나 자격증에 매달렸는데 그때 난 공부가 하기 싫었고 휴가는 멀었고 연애도 스탑. 철저히 혼자였다. 남들은 여름을 바삐 보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릴없이 소파에서 리모컨만 돌리다 우연히 영화를 틀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낼 수 있는 건 두 시간짜리 영화뿐이었다. 말 그대로 '시간 죽이기' 용이었기 때문에 아무거나 틀었다. 그게 영화의 세계로 눈을 뜨게 할지 전혀 모른 채.
타셈 싱 감독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기묘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재생했는데 오프닝부터 웅장하고 압도적이라 시선이 그대로 스크린에 붙잡혔다. 곧이어 동공이 두 배는 확장될 만한 훤칠하게 잘 생긴 배우 리페이스가, 그렇게나 좋은 몸을 하고선 병약하게 침대에 누워있다. 시선이 안 갈 리가 있나. 극 중 그는 낙마 사고를 당한 스턴트 배우 로이. 인생을 비관하며 슬럼프를 겪고 있는 로이에게 다른 병실에 입원해 있는 꼬마 알렉산드리아가 찾아온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 같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현실에 찌든 어른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아이의 순수한 상상과 맑은 시선을 통해 로이는 물론이고, 무심결에 영화를 보던 나까지 치유하기 시작했다.
-내 영혼을 구원해 주려고?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를 죽이지 마세요.
생을 마감하려 하는 로이를 그 작은 꼬마가 계속 일으킨다. 행복은 없을 거라던 비관론자에게 말 한마디가 희망이 되어 마지막 동아줄이 되는 과정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묘하고 심오한 특유의 영상미가 낯설지만 신기했다.
시간을 때우려고 틀었는데 오히려 영화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빠져든 아이러니. 영화가 끝나고 영화 속 숨겨진 의미와 장면의 뜻, 감독의 전작,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CG일 줄 알았던 배경은 올 로케이션 촬영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알게 됐고, 로이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족 왕으로 나왔던 그 배우였다는 것 등. 거미줄처럼 이어진 영화 세계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방학 내내 집에서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다. 이런 걸 '덕질'이라고 하는구나 새삼 깨달을 만큼 이 감독의 다른 작품, 이 영화의 다른 시리즈, 이 배우의 다른 대표작... 주옥같은 대사들과 소름 돋는 연출들에 감탄을 그치지 못했고 아무 생각 없던 텅 빈 여름이 좋은 영화들이 주는 용기와 메시지로 꽉꽉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다음 해에는 서울과 부천, 부산 영화제에 구경을 갔고, 또 그다음 해에는 영화제에서 일을 했다. 비록 지금은 영화가 취미일 뿐이지만 여전히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단 하나의 예술이다. 가끔은 말만 많고 내 마음 몰라주는 친구보다 훨씬 나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건 때론 영화 속 주인공이거나 책 속 한 구절일 때가 많으니까. 조바심 내지 않고 멍하니 누워있길 잘했지. 남들 따라 이리저리 치여 살았다면 그날 영화를 볼 일도 없었을 테니.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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