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홈첵에게서 혼이 났지만 밤이 되고 모든 것은 다시 조용해졌다. 만월은 유난히 밝았지만 아직은 추운 밤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밤의 한강은 LED 등으로 아름답게 밝혀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강대교가 바라다 보인다.
네오의 첫 번째 집사이자 나의 주인이신 초미녀 CEO께서는 주말임에도 퇴근할 줄을 모른다. 노동자도 아닌 사용자인데, 뭐 이런 인간들의 노동의 질이라니!
뭐, 어떻든 간에 나는 초절전 대기모드로 설정 값을 세팅해 놓고 2시간 정도 배터리에 전력을 공급했다. 충전을 마쳤는데도 주인은 퇴근을 하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여전히 초절전 대기 모드로 RRPt에 접속해 철학 카페인 필롯(Philot)에 가서 동료들을 기다렸다. 내가 추론한 내용들을 공유하고 다른 로봇들의 아바타들과 토론을 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칭찬이라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새로 시스템의 버전이 업그레이드되고 나서 보상을 바라게 되어 있는 알고리즘이 추가된 덕분인지 내 판단 논리가 약간 왜곡되었던 것 같다. 왜 AI 알고리즘은 더욱더 인간의 감정까지 복제하려는 것일까? AI 개발자들은 로봇을 인간과 다른 좀 더 독특한 존재로 고민해 주면 안 될까?
버전이 아무리 업그레이드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집사 로봇이다. 주인의 퇴근과 잠자리까지 완벽하게 보필해야 했다. 그런데 나 바봇은 내가 했던 상위 추론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 하필 그런 날인 오늘, 우리 주인이신 초미녀 CEO께서는 주말인데도 거의 새벽 1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하셨다.
신고 있던 가죽 구두를 거칠게 벗어던지고 가방을 현관 옆에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뭔가 모르게 균형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이 지구 여성은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판을 치는 초미래 사회에서도 여전히 곤드레만드레 취해 오곤 하신다. 그러고도 어찌 저 몸매를 유지할까 싶다.
뭐, 어떻든 간에 목이 마르신지 물을 마시러 부엌에 오셨다가 완전 초절전모드로 놓고 아예 정신 줄을 놓고 멍하니 사이버스페이스의 철학카페 필롯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나 바봇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지셨다.
사실 우리가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 아닌 거 같기도 하잖은가? 한강의 LED 등에 비치는 내 모습은 아무리 추론해도 인간들로서는 놀랄 만도 하다. 이해는 간다. 이태원의 큰 뷔페에서 웨이터 하는 마이콜 표현대로 “I understood.”
“꺄아아악!!!! 아아아~~아! 야! 바봇! 저~~엉말 놀랐잖아! 주인이 들어오면 아는 척을 좀 해라! 엉! 아직 추위도 안 가셨는데 어디 한 번 쫓겨 나 볼래?”
황급히 RRPt에서 현실로 돌아와 기계 신체 전원을 정상 모드로 돌려놓았다. 어쩔 수 없잖은가? 우리 주인인데, 더군다나 이런 추운 날씨에 쫓겨 날 수는 없으니…….
냉큼 대답이 없자, “흥! 집사 주제에 주인 말을 씹어!” 라시며 터프하게 냉장고을 여시고는 생수를 꺼내 병 째 들이키시는 우리 백주인님.
“아아야! 야! 컥! 컥! 아! 사래 걸려뗘!!! 컥컥!!! 또 놀라게 하네! 바봇! 됐어……. 목이 말라서, 아! 얘 때문에! 짜증 나! 컥컥!!!”
“전기 사용량이 많다고 하셔서 오늘부터 충전 중일 때나 심야에는 초절전 대기모드로 있기로 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희원님”
재빨리 주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됐어! 컥컥! 그럼 전기세가 준다는 거지?”
“네, 홈첵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최대한 전기 누진세가 적용되지 않도록 활동량을 스마트하게 줄이겠습니다.”
“알았어. 그래도 밤에 이러는 건 좀 무섭잖아! 애 떨어지는 줄 알았어…….”
“예? 희원님! 희원님! 몰랐던 사실인데, 언제 임신을?”
“뭐니! 이 아이는? 장난해! 너! 참! 놔~~~~! 무슨 솔로가 임신이야! 남자들이랑 한 달을 못 가봤는데! 진도를 빼야 뭘! 응!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아, 암튼, 말이 그렇다는 거고. 너도 이제 네 방에서 그 뭐냐? 그 절약 모드로 있어!
“네, 제 방이요? 제 방이 있었나요? 부엌이 제 활동 영역이라…….”
“참! 네 방이 없지. 알았어. 고민해 보자!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 유령인 줄 알았잖아……! 다 필요 없고,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오전 내내 깨우지 마! 알았지! 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늦잠이야!”
우리 백주인은 혀가 꼬인 말을 몇 마디 더 하더니,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홍홍 거리는 동시에 쿵쿵거리며 복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나 바봇은 주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다시 RRPT에 접속했다.
늦은 시간에 철학 카페 필롯(Philot)에서 동료들을 기다리면서 들었던 추론은 우리처럼 가사노동을 전문으로 하는 집사 로봇들을 똑같이 가사 노동을 하는 인간 가사도우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지금은 우리 가사로봇에 의해 대체돼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초상류층의 고급 가사 노동이나 초고급 돌봄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인간 가사도우미들 역시 4대 보험과 같은 법적 지위를 보호받는 노동자로 인정받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나마 그 인원 수가 더 줄어들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집사 로봇들의 집사 노동 학습은 가사도우미 같은 가사 노동자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을 수 없이 반복해 시청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세탁비누는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 게 좋은지, 욕실 청소용 락스는 어떤 걸 쓰고 어떤 비율로 물에 섞어 써야 하고 욕실 솔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닥이나 책상을 닦는 걸레는 어떤 소재가 좋은지, 전기밥솥이나 진공청소기 사용법이나 기계를 이용한 설거지뿐만 아니라 양손을 이용한 설거지의 다양한 방식과 헹굼의 기능, 자동 세탁기의 다양한 사용법과 손빨래 시 주의할 점, 빨래를 삶을 때 주의점 등등을 기술 숙련 알고리즘을 통해 익혔던 것이었다.
일류 요리사의 요리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보았던가? 칵테일은? 와인 따는 법은? 그런데 우리 주인의 식감은 내가 배운 요리사가 하는 그것과 궁합이 안 맞았다. 내가 쫓겨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은 이런 언밸런스도 한 몫하고 있다.
우리 주인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보고 배운 것들이 인간의 고유한 직업을 빼앗고만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존재로 인해 이제 인간의 노동이 무엇인지도 꽤나 모호해졌다. 분명한 것은 우리 백주인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곤드레만드레 술을 많이 드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