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사 이야기

어느 남성형 로봇 이야기(연재소설 #23)

by 정창영

어느 집사 이야기 ver1.23



아름다웠던 황혼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드디어 백주인이 노자도덕경의 비밀을 담고 있는 빌라 복층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주인의 뒤에는 백주인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건강한 미인이 들어왔다. 어, 어라! 이 분은 나에게 “아뵤!”와 “변태 새끼!”라는 말을 함께 알려준 옛 주인의 전 여친이자 분당의 절권도 초고수 아니신가? 이런 인연이라니?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까칠하기 그지없던 저 검은 돼냥이 네오가 오늘의 이 손님에게는 지극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어머! 오똑해, 오똑해!!! 언니 얘가 네오죠!”


이 미녀 무술 고수가 저 검은 돼냥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말이다. 녀석은 그 옛날 존잘 훈남의 얼굴에 빨간색으로 줄 세 개를 만들었던 전과가 있다. 나 바봇이 살짝 긴장을 하던 찰나였다. 우리 백주인 역시 긴장이 됐던지,


“야야! 윤정아! 조심해! 얘가 긴장하면…….”

“괜찮아요. 언니! 아웅! 귀여웡, 귀여웡!”


평소에 건드리기만 해도 질색을 하는 녀석이 제 얼굴에 낯선 이가 부비부비 하는 데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다. 오! 처, 처음 보는 녀석의 모습! 이 녀석! 절권도 고수의 무공을 이미 꿰뚫어 봤단 말인가? 뭐가 됐든 네오는 전혀 공격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네오는 어쩌면 인간 종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이집에는 만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지구행성 남성들이 이집에 왔다가 몸성히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참, 바봇, 내 가방 좀!”

“네, 희원님!”

“아, 이 친구가 바봇이구나! 바봇, 하이!”

“아! 네, 안녕하세요. 손님! 이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명색이 만만치 않은 복층 집의 로봇 집사인데 이 정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은가? 백주인의 가방을 받으며 구면인 무술 고수이자 건강 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나를 못 알아보신다? 2년 전 나 바봇이 그래도 나름 유명 레스토랑의 레시피를 토대로 연인을 위한 코스 요리를 대접했던 적이 있는데……. 하긴 나랑 똑같이 생긴 TIMOs-20(Lst)급 로봇만 지구행성 대한민국 서울에만 이만 대나 있으니…….


주인의 가방을 복층 주인의 화장대 옆 테이블에 갖다 놓고 내려왔다. 그제야 이 절권도 미녀는 네오를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네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거실 소파 옆으로 가 몸을 둥글게 말고는 블랙홀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 블랙홀 안에서 여전히 홀로 비트가 반짝였다.

...



냉면 그릇은 거의 다 비어졌다. 수육과 백김치 접시도 비었다. 잘 말아 드시는 소맥으로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비웠다. 두 분 다 잘 드셨다. 세상 불공평하다. 저렇게 잘 먹는데 살이 안 찌다니……. 인공지능 로봇의 생도 쉬운 것이 없다. 세상만사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 바봇은 식사의 마무리를 위해 드립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과 손님은 음식에 대해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면 다행인 것이다. 두 분 다 술기운이 좀 오르신 상태. 21세긴데 친한 고향 동문 선후배 사이란다. 세상 좁다. 그때였다.


“언니? 나 아는 클럽 DJ 하는 오빠가 있는데 말야.”

“너 요즘도 클럽 다니니? 옛날에 이상한 변태 만나고는 안 다녔잖아.”

“응, 아! 그때 받은 귀걸이는 챙겨도 되는 건데……. 그때 빡친 거 생각하면… 아니 여하튼 한동안 안 다니다가 요즘은 강남 쪽은 안 가고 홍대촉만 다니지. 언제 같이 갈래. 언니?”

“아니. 아니……. 얘는? 나 원래 안 가잖아! 그런데, 그런데, 그 오빠가 뭐?”

“그 오빠가 대개 촌스럽게 옷을 입혀서 로봇 DJ를 데리고 다녔어. 요즘 걔가 오빠보다 더 잘 나갔나 봐. 정말!”

“그게 뭐? 뭔 말인데 빨리 얘기해라! 가스나야!”

“알았다. 언니야! 그 오빠 대개 사람 좋거든. 그런데 로봇 DJ가 글쎄. 인기가 생기더니만 이제 개기더라 안카나. 말이 되나 안되나?”

“그래! 어머머! 그래서, 그래서…….”

“정확히 말을 안 해줘서 정확히 어떤 일인지 모르는데 다른 로봇 DJ 쓰고 걔는 어디 팔았다 카더라고! 요즘 로봇들 스마트하게 엄청 잘 나오잖아. 마음까지 케어하고……. 말도 잘 알아듣고……. 멋지잖아!”

“응, 그렇지.”

“(목소리 낮추며) 언니도 이참에 집사 로봇 바꿔 봐봐!”

“오우!!! 야아! 나는 쟤 괜찮아. 말을 좀 못 알아먹어서 그렇지. 나름 얼마나 열심인데…….”

“그래도 몇 년 쓰면 기계들도 고장이 나고 하잖아!”

“아이, 마, 고마해! 캭! 가시나! 부산녀자들은 의리 하나는 있다 안카나! 어이!”


나 바봇은 이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서글프고 한편으로는 우리 백주인을 믿을 수밖에 없다. 뜻밖에 노란 잠바의 이야기를 여기서 들을 줄이야. 이따가 얼른 RRPt에 들어가서 우리 동료들과 이 상황을 의논해 봐야겠다. 하긴 남 걱정해줄 때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씁쓸한 저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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