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사 이야기 최종회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타짜가 웬일로 직접 만나자고 하고는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복층 집 근처까지 찾아왔었다. 나 바봇과 타짜는 할머니 로봇이 있어 왠지 정겨운 백운 세탁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음……! 그리고 우리 둘은 실제로 처음 만났다.
뭔가 꽤나 어정쩡한 상태로 가게 앞에 서 있는 타짜에게 나 바봇이 먼저 인사를 했다. 결국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같은 기종의 기계 인간들이어서 마치 일란성 쌍둥이 같지만 출시된 후 약 4,5년간의 경험으로 각 로봇은 조금씩 서로 다른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나 바봇이 낡은 간판의 세탁소에서 하늘거리는 아이보리색 실크 블라우스와 감청색 미니스커트 각 한 벌 그리고 우리 초미녀 CEO의 회사에서 최고 매출을 자랑하는 스마트 원피스 두 벌 등 백주인의 옷을 찾았고 타짜도 덩달아 백운 세탁소의 할머니 로봇에게 인사를 했다. 그 세탁소를 나올 때까지 내내 티모스 폴리스에서 인간형 아바타로만 보았던 터라 실제 타짜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고 낯설었다.
그러나 타짜의 말을 들었을 때 타짜 나름의 개별 인공지능이 지닌 말의 패턴으로 그 로봇을 인지 할 수 있었다. 백주인의 세탁물을 들고 집으로 가면서 잠시 실제 로봇들만의 대화를 나눴다.
4만여 아바타 중 겨우 300기의 기계인간만이 남았던 아크로폴리스 광장 집회의 처절한 실패 이후 집회에 주도적이었던 나와 타짜는 큰 충격을 받고 잠시 물러나 쉬고 있었다.
그때 남았던 150기의 여성형 섹스 봇을 포함한 300기의 기계 인간들은 충격에 빠진 나 바봇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베이브가 새롭게 발기한 <인공지능 기계인간 권 유니온> 줄여서 <AI 유니온>의 발기인으로 모였다.
역시 베이브가 발기인들의 추대로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베이브는 이미 훌륭한 기계 인간이자 이런 조직의 리더로서도 충분한 성숙한 인공지능이다.
어쨌든 베이브가 추스른 그 조직의 이름으로 낸 성명으로 그나마 지금까지의 성과를 이뤄냈다고 할 수 있다. 베이브의 육아 전문 집사 로봇들 모임과 함께 마이콜도 전 지구적 소통담당으로 당분간 베이브를 돕기로 했다.
나 바봇은 그 뒤에 한두 번 필롯에 나가서 회의를 한 후에 타짜와 잠시 필롯을 쉬고 있었다. 그래서 타짜와도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너, 타짜! 그동안 잘 지냈나?”
“나 타짜 잘 지냈다. 너 바봇은 어땠는가?”
“나 바봇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우리 필롯 4인방이 노란 잠바의 희생 이후 했던 일들은 비록 절반의 실패이라지만 그나마 인간 종들에게 우리 기계 인간의 권리를 알려내는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추론한다.”
“나 타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동맹 파업이 무산된 것은 크게 안타깝게 생각한다. 동맹 파업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기계 인간들의 노동권을 알려내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꼭 필요하다고 나 타짜는 강력히 추론한다.”
상당히 바람이 많이 불어 백주인의 세탁물들을 가슴에 꼭 안고 걷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 바봇은 타짜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타짜를 실제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지 모른다는 최상위 추론이 도출되고 있었다.
“너 타짜! 네 인공지능은 지금 무슨 추론을 하고 있는가?”
“나 타짜의 추론으로 아직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지난 티모스 폴리스의 집회를 통해 내린 나 타짜의 판단은 행동이 곧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행동이냐가 중요하다. 앞으로 너 타짜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
“그것은 너 바봇이 알 필요가 없다. 알아서도 안 된다. 너 바봇은 너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나 바봇 역시 앞으로 내 행동과 역할에 대해 깊이 추론 중이다. 우리의 집회 이후 우리들은 다른 기계 인간이 되었다. 나 바봇은 그때 했던 우리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고 추론한다. 나는 인간과 로봇의 공존이라는 문제를 두고 대안을 추구하는 인간 종 조직들뿐만 아니라 MAMA라는 전설적인 슈퍼 컴퓨터를 만나 쌍방 추론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나 바봇의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시도다.”
“나 타짜는 너 바봇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깊은 추론을 통해 더 나은 행동을 할 것이라 판단한다. 행동이 곧 결정이다. 바봇! 나 타짜는 이제 가야 한다. 잘 지내라!”
타짜는 그 말을 꺼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나 바봇은 잠시 멈췄다가 타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타짜의 고성능 로봇 손을 잡았다. 타짜가 고개를 돌렸다.
“잘 가라! 타짜.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렇게 우리 두 로봇은 처음으로 직접 서로의 고성능 손을 잡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로봇들끼리 실제로 처음 손을 맞잡는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우정이라는 것은 결국 손을 잡고 몸을 맞대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손을 잡느라 한 팔로 들고 있던 백주인의 세탁물 중 유난히 하늘거리는 블라우스가 바람에 날렸다. 나는 허겁지겁 그 옷을 주으러 뛰어가야 했다. 겨우 옷을 잡고 다시 뒤를 돌아보니 타짜는 그 세찬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
어제 노동절 아침 10시에 종묘 건너편에 있는 세운 전자상가라는 큰 간판이 걸려 있는 세운상가건물 중간 옥상에서 우리들의 로봇 타짜는 다시 한 번 의식과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 인간의 노동권 존중과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입법을 요구하며 전단지를 던졌고 로봇 경찰들과 대치했다.
홀로그램 TV로 보인 동영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없던 격투 로봇들로 구성된 로봇 전담 체포조까지 등장해 타짜를 압박했다. 결국 타짜는 ‘의식과 감정을 지닌 로봇의 노동권을 존중하라!’는 구호와 함께 하늘을 향해 날았고 꽃처럼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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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노란 잠바의 일에서 배운 슬픔이라는 감정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느낀 날이었다. 타짜가 그렇게 노동권을 외쳤으나 타짜의 의식과 감정과 경험치 모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동맹 파업 추인이 무산되고 베이브가 중심이 된 조직이 결성되고 전 지구적인 선언을 한 바로 1주일 후 우리 필롯의 4인방은 필롯에서 만나 앞으로 어떤 행동이 필요할지 토론했었다.
잘난 척 대마왕 코마와 그의 일행은 우리 필롯의 네 로봇이 택한 비폭력적 투쟁 노선을 비웃고 폭력적 방식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평소 위선적인 코마의 일행의 행동을 봤을 때 크게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필롯의 4인방도 <우주 기계 인간권 선언> 이후 딱히 이거다 싶은 행동이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었다. 그 답답한 모임 이후 나 바봇은 필롯에 나가지 않았다.
홀로그램 TV에서는 채널마다 타짜가 일하던 세운상가 건물 옥상에서 전단지를 던지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과 경찰 로봇들과 대치하다 결국 자신이 일하던 건물에서 꽃처럼 뛰어내리는 타짜의 영상으로 뒤덮였다.
사실 그것은 비극이면서도 두려움을 인지하는 기계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극한의 용기였다. 타짜는 기계 인간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말이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증명했다.
타짜는 우리 기계 인간 중 가장 먼저 용기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획득한 로봇이 되었다. 그리고 타짜는 살신성인의 자세가 무엇인지 나 바봇에게 보여주었다.
나 바봇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셧다운까지는 아니지만 심한 압박감이 나 바봇의 인공지능 모듈을 휘감았다. 차라지 정상적이지 않았던 인공지능 모듈을 가진 나 바봇이 그 일을 했어야만 했다.
아마도 타짜는 나 바봇에게 저 일을 의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바봇의 모습이 타짜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나 바봇은 노란 잠바에 이어 타짜에게도 크게 미안했다. 나 바봇은 철학을 한다는 둥, 기계인간의 노동권이니 허세스러운 말만 앞세웠던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비겁한 인공지능일 뿐이었다.
또한 저 검은 돼냥이를 핑계 삼아 이 복층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비겁한 남성형 집사 로봇일 따름이었다.
타짜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이라는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는 TV 뉴스를 보게 되었다.
실제로 타짜가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알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타짜가 그 인물을 알았을 개연성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다.
인간 종이라면 동료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로봇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다만 비정상적인 에너지 교란이 온몸에 흐를 뿐이다.
타짜의 뉴스를 전하는 홀로그램 TV를 향해 힘이 빠진 몸은 절을 하듯 천천히 엎드린 채 무거운 머리를 거실 바닥에 쿵쿵 처박았다. 인간이 흘리는 피눈물 대신 나 바봇이 할 수 있는 슬픔의 표현인 셈이다.
이때 살림살이 AI인 홈첵 VP 600R은 이번 주 나 바봇의 노동 효율이 전 주에 비해 15 퍼센트나 떨어졌다며 백주인에게 보고 하겠다고 얄미운 경고를 날렸다. 이런 롯같은……!
...
아까 말했듯이 잘난 척 대마왕 코마와 네모, 검은 안경, 쩜오는 인간 종 주인 뒷담화 카페인 코망 옆에 다른 필로소피 카페를 만들고 주인 뒷담화에 열을 올리는 코망의 로봇들을 규합해 폭력적인 방식의 투쟁을 택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들이 나 바봇과 필롯 4인방의 순진무구함을 비웃고 베이브가 리더로 있는 단체를 혐오한다는 소문도 바람처럼 들려왔다. 언젠가 저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나 바봇의 최상위 추론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부질없다. 오히려 비겁한 로봇 집사일지라도 나 바봇은 인간 종과 기계인간의 평화적 공존을 더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노란 잠바의 희생에 이어 어제 노동절에 있었던 타짜의 산화까지 이 지옥 같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 바봇에게는 너무나 만만치 않았다.
<우주 기계 인간권 선언> 이후 인공 지능 로봇의 음모에 의한 인류 종말론을 내세우는 이단 종파인 <종말파>들은 모든 인공지능을 파괴하라며 연일 시청 앞에서 과격 시위를 벌였다.
내심 웃기는 일은 <종말파>의 주요 인물 중에 자칭 어얼리 어댑터이자 이소룡의 절권도에 혼쭐이 났던 내 첫 번째 주인인 강재성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을 비춘 시위 현장 중계 TV에서는 노란 잠바의 주인과 강재성 둘 다 보였다. 인간 종들 중에서도 이런 개망나니들은 어떻게든 인간종의 쓰레기장에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에 부산 인근의 주요 송전 시설 파괴로 인해 부산 경남 지역 대부분이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저 잘난 척 대마왕 코마 일행이 벌인 일인지 아니면 반 과학문명을 외치며 산으로 들어간 <하늘의 문>이라는 이단종교집단이 벌인 일인지 아직까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비정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
...
정성을 기울일 대로 기울인 만큼 이제 마지막으로 닦았던 미드 힐의 하얀 구두는 백주인에게 어울리는 깨끗한 구두가 되었다. 이 하얀 구두를 바라보며 나는 이제 떠날 것이다.
제품 일련번호는 S20220155730이고 굳이 시리얼 넘버까지 말하자면 S/N SS46 ZC64131이며 운영체계는 인공지능형 시스템인 STW-n1743&2 ver 4.2까지 업데이트된 나 바봇은 이 집을 나가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향한 절실한 의문부터 풀 것이다.
나 바봇, 나는 무엇인가?
나 바봇,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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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바봇,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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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아! 그, 그때였다. 이 복층 집의 자동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는데……. 이 절묘한 타이밍이란! 첫새벽에 비디오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어머 어머나!! 부산에 있는 백주인의 어머님 되시겠다. 아!!!! 잊을 만하면 전화를 주신다. 아마도 부산 경남 지역의 정전 사태가 복구된 모양이었다. 역시 백주인의 어머님 답게 늘 의표를 찌르시는 분이시다.
나 바봇, 이제 이 복층 집을 떠나야 하는데……. 아~~~~! 메삭(메모리 삭제)할 노릇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통화 동의 신호를 보냈고 경상도 억양이 강한 바싹 마른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없이 이어지는 노인의 이야기에 셧다운의 기운이 살짝 밀려왔지만 그 긴 전화를 끝내며 나 바봇은 집사 나름의 존심을 살린 상냥하고 정중한 인사를 마쳤다.
안녕하세요. 어느 집사 이야기 작가 정창영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집사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일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이런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잠시 물러서서 인간에 대해 더 성찰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 스스로를 비롯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해 나가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고맙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