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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영 Sep 18. 2016

Underground Boy

- 다방집 소년(연재소설 #1)

1.


 오늘은 엄마가 모처럼만에 보도방에 전화를 걸었던 날이었다. 또한 여름방학이 끝나 2학기 개학을 하고 등교한 지 채 3주도 지나지 않아 벌써 나는 다방 년 아들이란 소릴 들었던 날이고 싸움 따윈 아예 생각도 안 한 날이었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제 12대 대통령은 86 아시안 게임까지 유치했고 그 시작이 불과 열흘도 남지 않았던 날이기도 하다.

 17살은 늘 거시기가 꼴린다. 사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 근처에서도 바닷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D시의 신도심에서 다방을 하는 지하실에 꽤 오래 살고 있던 나는 철이 좀 들고 나서는 거시기가 늘 꼴렸었다. 뭐가 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우리 다방집에 오는 아가씨들은 늘 나이가 좀 있었고 자주 바뀌었으며 간혹 내 거시기에 관심을 두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유독 이번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우리 다방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미스 서 누나가 사정이 있다며 일을 그만두었다. 미스 서 누나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하는데 우리 다방집이 장사가 잘 안 돼 월급이 자꾸 밀린 탓인 것 같았다. 언뜻 착한 미스 서 누나랑 다방집 마담인 엄마가 그동안 밀린 월급 문제로 서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도심 개발 초기에 수도 다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장사를 시작한 우리 다방집 옆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에 다른 다방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것이 문제였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서 읽은 바로는 경상북도만 해도 82년부터 지금까지 한 해 250개씩 다방이 새로 생긴다고 했는데 경상남도 D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덕분에 지난여름 방학 동안 나는 레지 아가씨 한 명 없이 장사를 하게 된 다방집 도련님이 된지라 어쩔 도리 없이 틈만 나면 “조군아!”라고 나를 부르는 손님의 담배 심부름을 했고 커피잔이 쌓이면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덕분에 양손에 주부습진이 와서 상당히 우울하던 차였지만 그렇다고 다방집 도련님 주제에 이런저런 사정을 어디다 대놓고 얘기할 형편은 아니었다.

 간혹 양말을 짝이 맞지 않게 신는 것이나 구멍 난 양말을 신는 것도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교양 있는 여자라도 울 엄마처럼 일하는 여자들은 매우 무지 많이 바쁘다고 믿는 까닭에 별 말없이 그 양말을 신고 다녔다. 어떨 땐 짝짝이에 구멍 뚫린 양말을 신었다. 뭐 어때! 싶었다.  

 문득 이렇게 효심이 지극한 아들인데도 어쩐 일인지 커오면서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오늘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오전 내내 졸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 도시락을 먹고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려고 학교 복도를 지나가는데 복도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졈마! 다방 년 아들인데 지 아부지도 누군지 모린다카더라!”

 “맞나? 누가 자 엄마가 전라도년이라 카던데….”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섰다. 눈에 불똥이 튀는 데다가 울컥한 참에 뒤를 돌아보려다 참았다. 그리고 가던 길을 갔다. 가는 길을 가면서 나는 내 아버지 얼굴을 정말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아빠에 대해 물어봐야 미국에 돈 벌러 갔다는 말이나 했다. 어떻게 사진 한 장이 없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예전에 학교 친구들에게 저런 말을 들으면 좀 싸워도 봤지만 주로 맞았다. 그러나 다방 년 아들에 지 아부지 얼굴도 모르는데 괜히 친구들하고 싸움이나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후레자식이라는 둥, 호로새끼라는 둥, 싸움이나 하는 문제아라는 둥, 뭐 그딴 소리를 하나라도 덜 들어야겠기에 앞으로 싸움은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어쨌든, 내가 사는 수도 다방에서 의외로 17살은 담배 심부름이나 설거지 외에도 꽤 쓸모가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부는 D시의 구도심이 있는 항구 여객선 터미널 근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전통의 D 남녀 공학 고등학교를 다녀와서는 늦은 밤까지 귀가를 아니하고 행패를 부리는 만취한 진상 손님을 쫓아내는 게 가장 큰 쓸모다. 그다음이 다방을 쓸고 닦고 셔터를 내리고 나서 아주 정확한 서울말 발음으로 “이.씨.발.놈.들.아!”라고 어떤 성조도 없는 욕을 연습했다. 이런 서울말은 매일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말을 쓴다고 나를 죽이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특히 이런 협박을 받은 날은 더욱 열심히 서울말을 연습했다. 그러니까 세 번은 더 연습했다.

 그 아이들은 그런저런 이유로 나를 혐오했고 나는 똑같은 이유로 그 아이들을 혐오했다. 아무리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술집과 다방집을 하는 지하실에 산다고 그런 놀림을 받는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 어쨌든, 사람이 이런 놀림과 협박에 지지 않을 오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곤 했다.

 더군다나 나는 86 아시안 게임이 곧 개최되고 88 올림픽이 겨우 2년밖에 남지 않은 저 거룩한 서울 태생으로 주민번호가 10으로 시작하는 것이 내 유일한 자랑이었다. 엄마는 서울 여자였고 나는 서울 여자의 아들이었다.  


                                                                     …


 나는 오전 잠이 많다. 아침 1교시에 그 어떤 수업을 하든지 잠이 쏟아졌다. 거시기는 꼴렸고 잠은 쏟아졌다. 잠을 자면서도 거시기가 바지를 뚫고 나갈 기세여서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쓸데도 없는데 어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해서 나는 내 거시기가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내가 다니는 D 남녀공학 고등학교는 학생 수가 모두 구백여 명 정도였고 남학생반과 여학생반이 따로 교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만 같이 쓰는 셈이었다. 그나마 수시로 텐트를 치는 문제의 거시기 때문에 여학생 눈치까지는 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말했듯이 17살은 다방에서 할 일이 아주 많다. 밤늦게 술에 취해서 진상을 떨며 레지 누나나 마담인 엄마를 괴롭히는 손님을 쫓지 않을 때도 12시 반쯤 장사를 마치면 88부터 장미, 청솔, 라일락 같은 각종 국산 담배들이나 간혹 마일드세븐 같은 외산 담배가 남긴 연기로 자욱한 지하실을 환기시키고 7년이나 돼 모서리가 닳은 흰(?) 테이블들을 행주 걸레로 닦아야 했다. 그러고 나면 새벽 1시였다.

 신도심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3층짜리 상가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다방집 홀은 한 20평 정도였다. 다방 입구 바로 옆에 카운터가 있었고 입구 왼쪽 벽에 거울을 붙여 실내를 넓게 보이게 했다. 반대편 비상구 쪽 벽에는 벽돌 문양 벽지를 발랐다.

 홀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준으로 양쪽을 반으로 나누는 1미터 정도의 중 벽이 있었는데 카운터 쪽에는 세로 약 1.5미터 가로 45센티 높이 50센티 정도의 길쭉한 어항이 있었다. 그 어항 양쪽으로 테이블을 놓고 의자를 놓아서 우리 다방집의 기준을 삼았다. 그 어항에는 항상 열렬히 키스를 하며 싸우는 키싱 구라미나 반짝이는 열대어 무리나 상당히 자란 잉어가 수초들 위를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홀에는 테이블이 10개 정도 있었는데 푹신하고 안정감 있는 검은색 의자가 테이블마다 네 개나 혹은 여섯 개씩 놓여 있었다. 보통 우리 다방집에는 늘 TV가 켜져 있었다. TV 방송을 하지 않을 때면, 홀 벽에 걸린 스테레오 스피커에서는 주현미의 트로트 노래나 조용필이나 윤수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다방집 홀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간은 잠잘 때뿐이었다.   

 내가 뒷마무리를 하는 동안 새벽에 내 도시락을 싸야 하는 엄마는 카운터 반대편 주방 뒤에 있는 3평 남짓의 다방 내실에서 잠을 청했다. 내실 옆 1평 좀 더 되는 쪽방이 내가 공부를 하고 잠도 자는 곳이지만 왠지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는 푹신한 다방 의자 6개를 붙여 침대처럼 만들어서 잤다.

 불을 모두 끄면 지하실이라 완전히 깜깜해질 것 같지만 비상구를 알리는 비상등은 항상 켜져 있었다. 그 덕에 홀 천장 네 군데에 조악하지만 그래도 나름 구라파의 위엄이 묻어나는 샹들리에 조명등이 빛났다. 그런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나 혼자 자고 있노라면 유럽 귀족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마침내 다방집 내실에서 엄마 코 고는 소리가 얌전히 들려오면 나는 주방 옆 내실 쪽 벽에 달려 있는 28인치 삼성 TV를 조심스럽게 켰다. 그 시간에는 AFKN을 주로 본다. 투나잇 쇼나 데이비드 레터맨 쇼 같은 건 전혀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냥 재밌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팝가수 마돈나나 그녀의 라이벌인 신디 로퍼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 유리 스미스의 뮤직 비디오 클립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흑인음악의 소울과 흑인 댄스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울 트레인(Soul Train)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것도 낙이었다. 늦은 밤 내 나름의 취향을 즐기고 나면 딱 새벽 3시. 아! 망했어……!!  

 보통 아침 여섯 시 반에 엄마가 잠을 깨우면 허겁지겁 이불 개고 고마운 의자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남녀 공용인 다방집 화장실 세면대에서 이 닦고 세수하고 아침을 약간 먹고 무조건 많이 들어가면서 옆으로 메는 프로스포츠 가방에 엄마가 챙겨 놓은 큰 도시락을 집어넣고 다방집을 나섰다.

 우리 다방집이 있는 D시의 신도심에서 여객선을 타는 여객 터미널이 있는 D 항구로 향하는 6번 시내버스를 15분가량 타고 가면 저 멀리 학교가 보였다. 버스에 내려서 5분 정도 언덕배기에 있는 학교 정문까지 헐레벌떡 뛰고 나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졌다.

 오전 내내 비몽사몽 하며 졸다가 점심 무렵 잠이 깬다. 엄마가 싸준 무식하게 큰 도시락에 담긴 밥을 점심 저녁 두 번에 나눠서 먹었다. 그나마 그 바쁜 와중에도 도시락을 싸주는 예쁜 엄마가 고마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온 다방 년 아들이란 말은 여러 번 들어도 참 싫었고 심지어 엄마가 전라도년인데 서울년 행세를 한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더군다나 3분기 기성회비를 왜 납부하지 않았냐고 대머리 담임선생에게 불려 나가는 것도 너무 싫었다.

 엄마는 고작 40대 초반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요즘 들어 뭐가 괴로운 지 밤마다 맥주를 드시는 일이 많아서 살집이 오르고 있었다. 간혹 새벽에 다방 1층 현관 셔터를 때리는 술 취한 동네 아저씨 덕분에 곤하게 자던 잠을 깨곤 한다. 차라리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 더 나았다. 하긴 그 시절에도 셔터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역시나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쾅쾅쾅! 그냥 쾅이 아니라 철로 된 셔터라 철컹철컹이 더 어울리나? 쾅과 철컹 사이? 뭐 어쨌든,

 “이 마담!!!! 이 마담아!!!”

 “함 보자고! 딱 술 한 잔만 같이 하자니까!”

 살짝 잠이 들었는데 깨고 말았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안 되겠다 싶었다. 일어나 다방 1층 현관 셔터 앞으로 올라갔다.

 “아저씨! 그만 가세요. 장사 끝났어요.”

 “문 열으라! 잉마에이! 확! 마! 다 때려뿌셨 뿐데이! 내사 힘 윽수로 세다이! 엉! 이 마담아! 아마담! 나오라케! 마! 어허!!”

 “가시라고요. 저 아침에 학교 가야 해요.”

 또박또박 매일 연습한 서울말로 대답을 했다. 동네 시장에서 이불가게 하는 주씨 아저씨는 나쁜 아저씨는 아닌데 주사가 장난이 아니다. 이 아저씨 때문에 여러 번 고생했다. 한동안 뜸 하시더니 요즘 또 이러신다.

 “문 열으라카잔아! 열으라고~~~!!! 얼릉 어른 말 안 듣나! 콱 죽이삘라마!”

 ‘쾅! 쾅! 쾅! 철컹철컹!’  맞다. 발로 차면 ‘쾅쾅쾅’이고 잡고 흔들면 ‘철컹철컹’하는 소리가 났다.  

 ‘하아!’

 어쩔 수없이 눈을 감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셔터 밖에 주사를 부리며 서 있는 주씨 아저씨의 마음속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래 봬도 나는 이런 재주를 가진 17살이다.

 아무것도 없는 어둡고 황량한 벌판 여기저기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마른번개도 쳤다. 무서워야 하는데 묘하게 처량한 풍경이었다.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아주, 아주 느리게 들려왔다. 나는 왼손까지 앞으로 들어 올려 마치 장풍을 쏘듯 손바닥을 모아 소용돌이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이러는 걸 언제 누구에게 배운 것은 아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공중제비를 넘듯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느새 바람이 잦아든 처량하고 황망한 벌판만이 남았다. 모았던 두 손을 풀었다. 그런데 문득 내 발 앞에 키 작고 가냘픈 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이 작고 힘없는 나무를 뽑아 버리면 주씨 아저씨의 목숨도 앗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굽혀 작은 나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쥐고 흔드니 아저씨의 생명수는 단단하게 뿌리내려 있지도 않았다. 순간 손이 떨렸다. 확 뽑아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떤 갈망이랄까! 한동안 참았던 것일까? 심하게 요동치는 마음에 깜짝 놀라 순간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셔터 안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서둘러 돌아왔다.

 현실의 내가 눈을 뜨자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던 그 거친 소리는 잠잠해 있었다. 대신 얼마간 숨을 못 쉰 듯 컥컥 대는 주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억, 컥!!! 컥컥!!! 아! 내사 갑자기 숨이 턱 막히가 죽을 뻔했다 아이가! 아이고야!”

 “아저씨! 그러니까 가세요.”

 “으, 응, 응! 컥컥! 아이고! 으응, 알았다. 마! 내 간다고! 간다니까! 아이고야!”

 공포에 질린 주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고 잠시 아저씨가 가는 걸 확인하고 뒤돌아서는데 뜻밖에 엄마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왜! 왜! 안 자고 나왔어?”

 “성재야!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아들!”

 보기 드물게 어두운 표정의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공지능 로봇 집사를 다룬 <어느 집사 이야기> 이후에 오랜만에 새로 소설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중반 바닷가 소도시 지하 다방에 사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일종의 판타지입니다. 국가 독재가 만연한 시대의 어두운 공기를 비교적 무겁지 않게 그리고자 합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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