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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Sep 22. 2024

#001(1일차) D-100

오늘부터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나의 일상에 배경처럼 틀어놓는 클래식 FM 오전 어느 프로그램애서 9/22 오늘이 추분(秋分)인 동시에 올해 마지막 날로부터 거꾸로 땩 100일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일부턴 낮보다 밤이 길어지고 100일 후엔 2025년 1월 1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행자는 자신의 그날 그날 방송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기록의 의미로 개인 SNS에 지금처럼 열심히 계속 올려두겠다는 멘트를 했다.


그 멘트가 게으른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아마 그 SNS는 인스타그램인듯했다. 나도 최근 지인의 적극 추천으로 인스타계정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 포스팅을 둘러보긴하지만 멋드러진 사진과 짤막한 글로 개방적으로 나의 일상이나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이 내게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폰 일기쓰기 기능을 종종 이용하는데 그걸로 100 일동안 매일 써볼까도 한번 생각해봤지만 결정적으로 그건 지속성에 대한 자극이 전혀 없다는 약점이 있다. 하여, 매체를 좀 고민하다가 몇달 간 거의 닫아둔 이 브런치가 떠올랐다. 글 호흡이 긴 편인 나에겐 비주얼 위주의 화려한 인스타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져서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정했다.


지난 몇달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글에선 ‘지금 여기’ ‘오늘’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 오늘 나의 생각, 오늘 나의 감정.


브런치 연재 기능을 한번 사용해볼까도 생각하고 있다. 적절한 압박이 필요할 것 같아서다.

게으른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지만 가능하면 내용이나 반응에 욕심내지 않고 글 퇴고나 교정에도 얽매이지 않고 일단 거칠고 엉망이어도 매일 한 줄이라도 ‘솔작하게’ 100일 동안만.





D-100

2024년 9월22일 일요일.


Mary Cassatt


오늘은 일요일같지 않은 일요일. 아침 7시 알람 전에 잠이 깨어 누운 채로 핸폰을 보니 남편은 이미 프랑크푸르트애서 환승해서 인천으로 오는 중인듯하다. 오전 10시도착예정이었지만 30분 지연출발했으니 늦게 도착할 터. 불편한 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자고있을, 하늘에 떠있을 그를 위해 잠깐 기도했다. 더 누워있을 수가 없다. 곧 하루종일 연합시험을 치르러 화실에 가는 아이의 아침밥 준비를 서둘러야했다.


어제 주문하고 오늘 새벽에 받은 전복 3개 중 하나를 물에 데쳐 재빨리 손질해서 잘게 으깨어 역시 작게 잘라둔 묵은지와 섞어 참기름 양념을 한 뒤 따뜻한 밥에 넣어 엄지손가락보다 통통한, 한입에 쏙 들어갈 크기의 미니 주먹밥을 만들었다. 6개 만들었는데 딸은 입맛없다고 4개를 겨우 먹고 나서 연필50자루가 담긴 커다란  키트가방, 파렛트, 붓과 물통 등 바리바리 짐을 챙긴다. 그래도 문닫고 나가기 전에 내 얼굴 한번 보고 엄마 고마워 잘 다녀올게 오늘은 착하게 인사를 한다. 어제 비가 내린 후 여름내내 틀어놓던 에어컨 없이 처음 맞은 서늘한 가을 아침 공기 속에 머라카락 휘날리며 화실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이는 긴장이 됐는지 웬일로 시험 전 문자를 보냈다. 너무 떨린다고. 심호흡하고 마음 편하게 평소대로 하라고 답을 보냈지만 역시 마음이 쓰인다. 너는 혼자 잘 해낼 수 있단다. 망쳐도 괜찮아. 아이보내고 힘들어서 다시 잠깐 눕고싶었자만 퍙팽한 아이의 긴장이 느껴져서 그냥 손발을 바쁘게 움직이기로 했다. 주방을 정리하고 쌋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니 남편이 Landing했다고 톡이 왔다. 차가 부모님댁에 주차되어있어 가자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끝날 것 같지 않던 갈고 뜨거웠던  여름이 믿을 수 없을만치 갑자기 훅 가버렸다. 어제까지 여름, 오늘부터 가을. 돌이칼 수 없는 경계선이 완전히 그어졌다.


두 대륙을 연달아 이동해야했던 긴 여정의 출장 후 도착한 그는 여느 출장 때보다 지치고 무거워보인다. 맕투도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다. 조심조심 기색을 살피며 늦은 점심을 같이 한다. 별 반찬이 없지만 칼칼한 한국 반찬을 먹으면서 얼굴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표정도 느슨해보인다. 정상 컨다션으로 돌아오려면 1~2주는 걸릴 것이다. 내일 하루 쉬고 다시 일정이 강행군. 10/1 임시 공휴일 10/3 10/9 휴일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조선, 아내 열전>  (백승종, 시대의 창)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고려 말에 살았던 목은 이 색 부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경직된 조선보다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되는 부부애가 흥미로웠다. 2주 전에 부암서울미술관에 갔다가 추사 김정희 작품과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들을 관람하면서 조선시대 부부의 삶을 한번 상상해봤었다. 추사의 애절한 부부 사랑은 확 다가왔지만 현모양처의 전형인 사임당은 과연 남편과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가 없어 궁금했었다. 그림에 표현된 당당한 기운만 보아도 사임당이 당시 시대에서 느꼈을 갑갑함이 느껴졌다. 나는 어떤 아내이고 엄마인가. 20대 30대에 나는 여성학 강의를 듣고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 빠졌었고 그 방향으로 강의까지도 했었다. 나의 큰 멘토인 Giuliana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항상 놀리지만 과연 나는 잔짜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스트였나? 사실 그런 개념적 분류 자체가 지금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잘 살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회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다.



한 명은 긴박한 일정 속에 귀국했고 또 한 명은 긴박한 시험으로 하루를 보냈가에 나 역시 그 긴박함에 함께 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꽉 채워 보냈다. 먼나라에서 무사히 돌아와준 것도 감사하고 하루종일 화실에서 시험을 잘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응원하느라 마음쓴 나에게도 수고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P.S. 짧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난 역시 …줄여서 간명하게 쓰는게 잘 안된다.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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