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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Sep 23. 2024

#002(2일차) D-99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중에 이 구절만큼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 없을 듯하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복음서 14,26)


내가 사랑하는 가족구성원들을 미워하라니..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참 걸려넘어지기 쉬운 말이다. 구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나 여러가지 해설이 있지만 나에겐 어떤 신부님의 설명이 가장 쉽게 마음에 와닿는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자녀, 형제 자매, 자기자신을 미워하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진짜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 이상적인 어머니나 아내의 모습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약점 투성이의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형제, 자매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내가 원하는 이랬으면 하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미워하고 (없애버리고, 또는 거기에서 자유로워져서) 부족한 점 투성이인 나의 현실적인 실제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라고 그 신부님은 쉽게 설명해주셨다. 예컨대, 나에게 아버지란 자상하고 너그럽고 이해심이 넘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내 아버지는 이기적이고 구두쇠인데다가 자식말을 들으려하지 않는 사람일 때, 앞쪽에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아버지의 이미지를 깨어부수어버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저녁 산책길, 연못에 핀 연꽃들


누군가에 대한, 특히 가까운 사람, 그 사람이 가족일 때 그 기대치는 높아진다.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실망감은 커지게 되고 관계는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최근 내 주변의 몇몇 사람에 대해 실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안봤는데 저렇게 완고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자기 밖에 모르고 남은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구나...이런 부정적 판단에 머무르게 되면 되려 내가 더 고통스러워진다. 나 역시 내 주변 가족들, 지인들, 친구들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서 마음대로 기대치를 높이고 그 사람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내멋대로 판단하고 실망해왔던 것이 아닐까. 또 반대로 나에 대해 실망한 내 가족 중 한 사람은 (최근에 갈등이 있었다) 아마도 나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프레임 속에 기대치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나를 판단하고 관계에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모두 부족한 나에게 주어진 무상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판단할 일도 실망할 일도 별로 없을텐데 내가 가진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할 때, 불평불만이 생기고 내 자신 위주로만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 길고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오늘 살갗을 스치는 서늘한 저녁바람이 나에게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속삭이는 것 같다. 겸손하라고, 약점 투성이인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라고.  

가을의 투명한 햇살과 바람이 바꿔놓은 가을 정원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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