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같은 부모
이틀 동안 잠을 설쳐서 그런지 오늘 아침엔 유난히 눈이 안떠지고 자리에서 일어나가가 힘들었다. 근 3주 동안 나혼자 조용히 지내다시피하다가 식구가 한 명 돌아오니 그동안의 루틴에 그를 위한 일들이 추가되고(사실은 원래 있던 것들이었지만) 출장 이후에 나온 빨래며 정리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다시 출근하기 전에 같이 해결할 일들이 있어서 바쁘게 이틀을 보냈다. 이 와중에 자동차 타이어까지 펑크가 나서 (수리하러 가서 보니 못이 박혀있었다) 아침 일찍 정비소에도 다녀와야했다.
오늘은 딸아이가 등교하지 않고 오전에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기로 한 날이다. 예고 입시를 4주 앞두고 주말도 없이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강행군을 하니 아이가 너무나 지쳐보여서 결석계를 내고 반나절 쉬고 오후에 실기수업에 가기로 서로 이야기를 해두었다. 일요일에도 하루종일 시험을 보았기에 잠이 너무 부족해서 평소보다 두어시간 더 아침잠도 재우고 싶었다. 아이는 9시에 일어나도록 알람을 맞춰두고 나는 분주하게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나도 같이 씻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폰 전화밸이 을렸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아뿔싸! 아이 담임선생님 전화였다. 8시 반이 아침조회니 그 전에 내가 학교에 못간다고 문자를 보냈어야했는데 그냥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몸둘 바를 몰라서 그저 쩔쩔매며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거듭 말씀드렸다. 담임은 "어머니, 8시30분 전에 문자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무단결석입니다."라고 가르치듯이 말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학기초 학부모설명회에서 만나본 바, 1,2학년때 선생님과는 다른 좀 특이한 유형이었다. 우선, 학부모들에게 상당히 전투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전에 학부모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선을 넘을 시 가만있지 않겠다는 투의 선언을 해서 엄마들을 (몇몇 아빠들도) 질리게 했었다. 차분한 성품이기보다는 감정적인 편이라고 여겨져서 아...웬만하면 부딪칠 일을 만들면 안되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들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이들에게는 시원시원하고 소소한 공부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아이들은 의외로 담임 선생님의 다소 거친 태도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했다. 여튼, 그런 선생님이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으니 내가 안절부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30분 전화를 늦게 한 것이 이렇게나 쩔쩔맬 일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여학생들이 종종 예고 없이 생리 결석을 해서 조활동에 지장을 주거나 발표에 불참하거나 하면 당황스럽긴했지만, 그것이 이렇게 화낼 일인가 싶었다. 언짢은 마음이 들어 심호흡을 하고 기분을 전환하려고 서둘러 준비하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아이는 집을 나서며 친구들에게 문자가 와있다며 선생님이 '000 오늘 무단결석이야!' 라고 말해서 너 큰일났다며 걱정스런 메시지를 보냈다한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가 통화해서 해결되었다고 안심을 시켰지만...속으로는 짜증이 올라왔다. 이제 2학기고 입시 막판이라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십대 아이,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과 기질을 가진 딸을 키우면서 참 많은 자녀교육서를 읽었고 영상도 찾아보고 상담도 받아보았다. 최근 들어 가장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듬성듬성 돌담같은 부모가 되라"라는 말이었다. 같은 열 다섯 딸을 가진 지인이 김창옥 강사의 강의를 듣고 나에게 전해준 말인데,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저 옆에서 멀찍이 지켜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듬성듬성 울타리가 되는 정도의 역할만 하라는 조언이었다.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그 사이로 바람이 들고나고 물이 새도 괜찮으니 믿음을 가지고 아이를 바라보라는 말인데 그 말이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다. 아이는 또래 중3 아이들보다 힘든 일정과 시험에 대한 압박감으로 힘들어하지만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길이고 최선을 다해보지만 혹여 안되더라도 다른 길을 찾아 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편하게 입시에 임하게 하려면 부모인 내 마음이 진심으로 편해야 아이에게 그 마음이 전달될 것이다. 미술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틈틈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아이는 엄마는 그런 이야기해서 김빠지게 한다고 듣기싫어하지만. 오늘도 이렇게 꽉 찬 하루가 저물고 있다. 투명하고 맑은 가을 햇살,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이 시원한 바람이 과연 얼마 동안 유지될까? 한달, 아니면 한달 반? 아마 곧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이 짧게 주어진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온전히 누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