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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Sep 26. 2024

#004(4일차) D-97

내 삶의 마지막 날의 표정

작심삼일...이 말이 다 의미가 있는 말인가보다. 

삼일이 지난 오늘, 유난히 급한 일들이 몇 가지 끼어들더니 급기야 11시가 넘어서 아이 소묘용 연필을 깎고 있다가 이미 12시가 지나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음. 그래도 유럽은 아직 25일이야,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좌절감을 다독여본다. 


인간에겐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다 '죽는다'는 점이다. 오늘은 '죽음'에 대한 주제로 전례를 했다. 미드라시*에 의하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세 천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것은 '늙음' '병' 그리고 '죽음'이라고 한다. 


죽음에는 물리적, 신체적 죽음이 있지만, 본원론적 죽음, 즉 존재의 죽음도 있다. 가톨릭신학에 의하면 이 죽음은 '죄'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어둠 속에서 걷는 사람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알 수 없듯이 죄를 지으면서 인간은 (신체적으로 살아숨쉬더라도) 본원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정말 막살았다고 해도 될 정도의 어떤 특정한 방황의 시기를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죽음의 시기였던 것 같다. 내가 누군지 나자신에 대해서도 캄캄했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도 알 수 없었던 무지하고 두려웠던 시기. 나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한 시기. 나아가 나를 방치하고 파괴하고 학대했던 시기. 그 시기는 어둠의 시기였고 죽음의 시기였다. 나는 그때 본원적 죽음을 경험했던 것 같고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 지금도 기적같기만하고 뒤늦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침에 딸을 학교에 보내면서, 내가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이게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이에게 그래서 가능하면 웃으면서 배웅하려고 애쓴다. 이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다면 인상쓰거나 잔소리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렇게 소중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미드라시(Midrash): 히브리 성경(구약) 중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혹은 그것의 해석을 뜻하는 히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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