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끄기의 가능성
직장을 그만두면서 의무로 만나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져서 너무나 좋았다. 물론 조직 안에서 소중한 인연과 만나는 행운도 있었지만 상하관계에서 필수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형식적, 의례적인 처신에 나는 늘 익숙지 못해 쩔쩔매면서 보냈던 것 같다. 억지로 참석해야 했던 회의와 모임들,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회식들, 그밖에 인사치레와 미묘한 기류에 신경쓰느라 소모되었던 에너지들. 그나마 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없었다면 내 기질상 오래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조직에 속해있을 때는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는 줄 착각했었는데 거기서 나와보니, 내가 그동안 진짜 힘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직생활에서 벗어난 이후 몇 년 간 나의 관계망은 중요도에 따라 조금씩 줄어들고 정리가 되었다. 결국 나에게 필요하고 내가 좋아하고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시 네트워크/망(nod)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망 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알고 지내고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과의 관계망이다. 영국에서부터 알게된 친구들도 있고 한국에 와서 만나게 된 친구들도 있다. 나이와 성별, 직업대는 물론 국적도 영국, 이탈리아, 미국, 콜롬비아, 스페인, 남아공화국, 도미니카공화국 등등 다양하다. SNS로 교류하는 친구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탈리아인 마르타와 만난 지도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수업을 한다. 원래 이탈리아어와 한국어 언어교환을 하기로 했기에 돈을 받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난 주에 마르타가 한국어를 배우던 학교부설 언어교육원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마르타의 한국어 레벨은 4급이지만 실제로는 2급 수준이다. 이런 애매한 단계에서 지금 그만두어버리면 안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유인즉슨, 가르치는 선생님이 자신을 배려하지 않아서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게 되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수업료를 환불받았다고 했다. 마르타와 한국어 강사와의 갈등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 한단계 아래 레벨에서 수업할 때도 그 강사가 너무 빠르게 말하고 자신은 수강생들보다 말하기 속도가 느려서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항상 불평했었다. 가르치는 강사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어의 네 영역, 즉 말하기, 쓰기, 듣기, 읽기 중에서 유독 말하기만 느린 학생을 따로 배려하기란 개인교습이 아닌 이상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수업 중 짝을 지어 하거나 그룹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다른 학생들보다 말하기 수준이 현저히 낮으면 서로 도움이 되는 학습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너무 느리게 말하니까 다른 수강생들도 자신과 짝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레벨이어도 조금 수준이 낮은 학생들이 많은 다른 반으로 바꾸어달라고 말하라고 권했었다. 그런데, 마르타는 그 말을 꺼내기가 너무 싫었다고 했다.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해야할 일인데 왜 자기가 굳이 이야기를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뭔가 마르타의 학습진행에 걸림돌이 되는 '자존심'의 문제가 느껴졌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억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어이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어버린 것이다.
마르타는 자신이 혼자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또 나에게 배우면 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난감했다. 사실 말이 언어교환이지 내가 마르타와 이탈리아어 수업을 마지막으로 한 건 거의 두 달 전이었다. 그것도 한국어 수업 1시간 30분, 이탈리아어 30분 , 이 정도 비율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이탈리아어는 20분, 10분이 되다가 지금은 한국어 수업만 2시간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나에게는 점점 이 수업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들어 마르타는 학습적인 관계가 아닌, 자신의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부분까지도 나에게 의지하기 시작해서 내 마음이 썩 편하지가 않았다 (참고로 마르타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 예상치 않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기분이 들었다. 마르타는 자신에게 모든 상황이 나쁘게 돌아간다고 불평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스테파니가 최근에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서 서울을 떠나게 되어 자신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며 울먹거렸다.
사실 나는 마르타가 한국어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말한 바로 그날에, 이제 한국어 수업을 그만하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힘든 상황을 듣고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르타의 한국어 수업을 100% 떠맡는 일은 거절해야 했다. 그래서 이제 딸의 입시도 2주 후이고 내가 맡은 다른 일들도 많아서 11월말까지는 너무나 일정이 바쁠 거 같아서 당분간 수업을 지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자 마르타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Don't leave me" 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움찔했다. 너까지도 나를 버리지는 마. 이런 말인거다. 응? 내가 이런 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마르타와 친밀한 사이가 아닌데, 이 상황은 뭐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일단 공부하러 같이 간 카페에서 차를 한잔 더 마시게 하고 진정을 시킨 후 간신히 차분하게 다음 일정을 잡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복잡했다. 안타까운 상황이긴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보였다. 한국어 수업을 해줄 수는 있지만 정서적인 부분까지 내가 도와주는 건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만일 마르타가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사람이었다면? 아마 만날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외국인이기에 내 마음이 더 약해지고 도와주고 싶고 내가 뭔가 죄책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내가 영국에서 거의 떠날 무렵,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박사논문은 마감이 다가오는데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위장이 탈이 나서 몇 달 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친구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화에 문제가 없도록 계란토마토탕과 찹쌀죽을 해주던 나보다 열살 어렸던 귀여운 중국인 남녀커플, 장을 보러갈 때 차를 태워주던 칠레 출신 영국인 친구, 결국 나를 이상한 일에 이용하긴 했지만 자주 만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멕시코인 베아트리체, 우울증 증세가 있을 때 병원에 가라고 진지하게 권유했던 이탈리아 친구 세레나 등등. 그 경험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마르타를 도와주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학습자로서 마르타는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서 한국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어를 배우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마르타의 문제는 내가 타지에서 겪었던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지금 나의 상태, 나의 상황은 어떠한가. 내가 과연 마르타에게 시간을 내어주며 도와줄 상황인가? 기꺼이 그럴 마음이 드는가? 자문해보았다. 대답은 No였다. 마르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나에게 우선순위는 당장 2주후에 실기입시를 치를 아이를 세심하게 챙기는 일이며, 그밖에도 부모님 돌봄도 나를 시급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11월까지 한달 간 수업을 중단하자는 메일을 보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모르겠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그러나 일단은 나의 시간에 대한 선택을 떠밀려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마르타에 대한 일을 이렇게 브런치에 시시콜콜하게 쓰는 이유는 나를 설득하고 내 상황을 좀더 객관적으로 알고 싶어서다.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군더더기가 생기면 삶이 불필요하게 고단해진다. 외국인이기에, 정서적인 결핍을 호소하기에 내가 내 예전 영국 생활의 경험에 자꾸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 거절당하는 것도 두렵지만 거절하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조직에서 떠났어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나에게는 어려운 숙제다. 다만 여기서 다른 점은, 내가 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자기 결정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지혜와 각성이 꼭 필요하다. 이후 마르타와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더 두고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