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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Oct 14. 2024

#023(D-78)오래전 편지를 읽으며

요즘 내가 컨디션이 좀 괜찮을 때,  평소보다 시간여유가 조금 있을 때 틈틈이 하려고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오래된 서류와 책들, 일기장과 사진, 편지 등을 정리해서 버리는 일이다. 


작년이었던가. 친구가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창고 가득 남기신 각종 영수증과 일기장, 편지와 서류를 처리하느라 정말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굳이 필요없는 것들을 애써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겨둘 일기장과 편지, 사진들. 그것들이 내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들도 꼭 남겨둘 것만 골라냈고 나머지는 다 찢어서 버렸다. 일기장은 아직 다 버리지 못했다. 편지들을 처리하는 건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내가 남편에게 꽤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서로 말을 놓지 못하고 존대를 썼던 연애의 초창기부터 결혼직전까지 내가 쓴 편지들은 다정하고 길었다. 그에 비해 남편의 답장(?)은 매우 심플했다. 나에게 석 줄 이상 쓴 편지가 없었다. 나처럼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고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을 이런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새삼스런 의문이 들었다. 


그 중에서 발견한 어떤 편지봉투에는 보낸 사람의 주소는 있었지만 이름이 없었다. 그 지역에 사는 것으로 짐작되는 당시 친한 여자선배인 듯하였는데 우리가 편지까지 주고받을 사이였나? 하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짧게 보낸 그 선배의 편지에는 간략한 안부 인사와 함께 마지막에


"그리고 00아, 너 이제 그만 좀 바쁘게 살아라" 


라고 쓰여있었다.


사실 선배라고 해도 한 살 차이고 학번만 하나 위였는데..나에게 타이르듯이 바쁘게 살지 말라고 조언하는 그 언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솔직히 이름이없어서 그 언니인지 백프로 확신은 못하겠다) 웃음이 터졌다.  내가 얼마나 정신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으면 이런 말을 편지에 써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정말 바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없이 방황하면서 바빴던 시절이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갈 지 몰라서 엄청나게 헤매느라 바빴다. 


지금 나는 바쁜 사람인가? 바쁘게 사는가? 


아니, 나는 전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 쫓기듯이 살고 있지는 않는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타이트한 긴장 속에서 살았던 날들이 언제였나싶게 지금의 나의 일상은 그보다 느리고 여유롭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십대 자녀를 둔 한국의 엄마가 한국 사회의 구조와 분위기상 바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로서 나는 많은 에너지와 돈과 시간과 감정을 쓴다. 나의 삶과 아이를 위한 이런 지원 작업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특히 감정적으로 아이와 적절하게 거리를 두기 위해 나는 지난 2년 간 필사적으로 노력해오고 있다. 올해 들어서부터는 이제 어느 정도는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선배 말대로 이제 더이상 쫓기듯이 바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기가 정말 쉽지는 않지만 많은 일을 해내기보다 한가지 일을 하더라도 온전히 그 일과 하나가 되어 내 상태를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 그 선배의 편지는 마지막 문장 외에는 별로 간직할 게 없다고 여겨져서 가위로 정성들여 잘라서 버렸다. 날 깨우쳐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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