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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Oct 13. 2024

#022(D-79)무표정도 괜찮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영국에 가서 친구들과 지인들이 사는 곳들을 방문하면서 3주 정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마지막 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나와 같이 방을 쓰는 동료 중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전공하는 멕시코 출신 베아트리스라는 유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의 소개로 아르헨티나 문학을 전공하는 '아이오나'를 알게 되었다. 아이오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품위있고 아름다운 백인 여성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에 키도 크고 이지적인 얼굴이어서 난 그녀를 볼 때마다 배우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공부도 잘해서 그녀는 졸업하기도 전에 에딘버러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줄곧 아이오나와 종종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아왔기에 그 때 에딘버러를 꼭 방문하기로 했고 아이오나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아이오나는 남편 다니엘과 어린 아들 두 명과 살고 있었는데 그 때 다니엘을 처음 보고 꽤 놀란 기억이 있다. 보통의 영국 남자와는 달리 거의 웃지 않고 (웃는 등 마는 등 아주 살짝) 나를 맞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아주 희미한 환영의 표정이었기에 그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아이오나와 둘이 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이오나는 다니엘이 자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표정을 바꾸는 일은 안하기로 평생 마음 먹은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고 다니엘로 인한 피해(?)를 자신이 대신 해결해야해서 (대신 더욱 크게 웃어주거나 미소지어야해서) 힘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다니엘의 인생 신조를 존중한다고도 말했다.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아이와 며칠을 머물렀던 아이오나의 집 거실. 왼쪽 한켠에 매트리스가 놓여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나의 해방일지> 중 어떤 회차를 보았는데 '해방클럽'의 새 회원으로 들어온 여자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자기는 늘 사람만 보면 자동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웃음 띤 표정이 되버린다고. 그래서 상가집에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어느새 사람들이 원하는 표정으로 굳어버린 자신의 얼굴 표정에 대한 표현이 와닿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딘버러의 아이오나와 다니엘이 생각이 났다.

내 주변에 드물게 몇몇 사람은 가식적인 표정을 거부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표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처음 대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적응을 잘 못한다. 무표정하거나 화나보이기도 하니까(나를 위해서 일부러 특정한 표정을 지어주지 않으므로)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 하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계속 만나는 동안에 그들의 그런 표정이 나중에는 편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기에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런가보다 하면 진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표정이 꼭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작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들은 친절하게 웃음짓던 사람들보다는 내 상황을 주의깊게 듣고 보던 무표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집에서 가족의 표정을 보라. 누가 나를 위해 일부러 미소짓지는 않지만 나를 사랑하고 돌봐준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어떤 면에서 무표정인 사람이 더 흥미롭고 재미있다.  억지로 꾸민 표정을 할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이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그 자유로움의 댓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욕을 먹고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표정은 어떨까? 나 역시 타인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 자리나 상황에 맞는 만들어진 표정을 짓는 사람이다. 가끔 정말 억지로 꾸민 표정이 주는 불편함에서 자유러워지고 싶다. 가장 나다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닌 사람이 되고싶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내면의 힘, 강한 멘탈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지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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